카테고리 없음

저녁에

황금횃대 2008. 8. 16. 08:48

며칠 동안 오후에 소나기 한 줄기씩 한다.

빗줄기는 양철 지붕을 질풍노도처럼 달려와 사라지고, 또 골목에서 생겨난 또 다른 파도가 지붕을 올라 탄다. 창문 앞에 서서 아랫채의 빗줄기를 쳐다보면 장관이다. 기껏 해야 열평도 채 안되는 아랫채 양철지붕인데, 소나기 올 때의 풍경은 끝내준다.

양철지붕 처마끝에서 골골이 떨어지는 낙숫물은 또 어떻고.

 

저녁이 다 되서 고스방 전화가 왔다

여기는 빗줄기가 잦아 들었는데 자기가 있는 김천(손님 태우고 김천 갔나보다)은 막 쏟아진다고. 그러니까 요점은 날더러 논에 가서 물꼬를 밟아 놓으라는 것.

여긴 비가 조금 밖에 안 와서 물꼬는 그냥 놔둬도 된다고 했더니, 아니라고 우긴다.

"그럼 물꼬 넘친다, 안넘친다에 소 한마리 내기하자."

"소 한 마리는 실효성이 없고, 통닭, 어때?"

전화를 끊고 날이 어두워지자 빗줄기가 거세진다.

이런, 통닭 한 마리 날라가게 생겼잖아.

통닥이야 날아가던 말던, 논둑 터지면 큰일이잖여

장화신고 우산 받쳐들고는 논으로 간다

아스팔트 위에 널찌는 빗방울의 변주가 자못 아름답다. 콩밭을 지나고 찬성이 아저씨네 논을 지나고, 포도밭을 지나고 논에 가니, 말랐다던 논은 물이 그득하다, 잽싸게 물꼬를 장화 뒷축으로 콱,콱 밟아서는 물꼬를 터 놓는다. 가둬진 논물이 터진 물꼬를 와,와, 내려간다.

잠시, 내 속의 답답함도 물꼬를 빠져나가는 물에 얹어본다. 지기럴. 그런다고 속이 시원하냐?

 

비 오는 날 논둑을 걸어가면 이런 영화 생각나지

옛날 이보희가 나오던 <무릎과 무릎 사이>

무릎 비비는 나오는 장면 말고, 뜬금없이 그 여자가 플릇을 들고 논둑에서 하얀 드레스 입고 악기를 불던 장면. 푸른 벼와 논둑에 하얀 여자, 그리고 은빛 플릇

 

나는 시퍼런 몸빼에 반팔 티가 다 젖고, 몸빼 아랫도리도 다 젖고...삽자루를 플릇대신 들고 그렇게 논둑을 걸어가는데... 뭘 얘기하자고 하냐하믄, 같은 배경 속을 걸어가더라도 삶은 영화처럼 애로틱하지도  들판의 황새처럼 희고 순수하지도 않다는 것. 복잡, 갈등, 아집,욕심투성이라 머리통이 빠개질 듯 아프다는 것, 아프고 아파도 벗어 날 수 없다는 것. 에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