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도 도마에 칼질 한 번 안하고 밥상을 차렸다
이런 밥상을 차린 날은 뭣인가 직무 유기한 느낌이다
밥상을 차린다함은, 이것저것 반찬을 나열하여 자고 일어난
허전한 뱃속을 채운다는 단순한 의미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의미의 전체가 아님을 안다.
맛이 있던, 맛이 없든 다들 한 술씩 뜨고는 집 밖으로 나간다
나는 식구들이 먹었던 그릇들과 반찬 그릇, 수저등을 걷어서
개숫물에 넣는다
식구 여섯이면 그리 많은 식구가 아닌데, 한 끼의 식사 후에
쏟아져 나오는 빈 그릇의 양은 언제나 개수통에 가득이다.
하나 하나 씻어 엎으면서 들여다 보니 그 모양도 참으로 가지각색이다.
여섯식구 밥그릇도 모양이 같지 아니하니, 먼저 아버님은 옥식기 모양의
스텐레스 그릇이고, 세사람은 약간 원뿔모양을 중간에 잘라 놓은 듯한
밥그릇이고 또 두사람은 원기둥 모양을 중간에 잘라 놓은 모양이고, 밥
양을 줄여가는 나는 아이들 이유식 그릇의 플라스틱이다.
국그릇도 이 밥그릇과 짝이 맞게 하니 또 각각이다.
거기다 떡볶기를 담았던 접시는 둥글며 오목하니 넓적하고, 아버님 무부침개를 담았던 접시는 정사각형의 바삭과자 모양이다. 제사 지내고 남은 조기 구운 것은
타원형의 길다란 접시고, 부침개 전골을 담았던 접시는 턱이 높은 납작한 접시다.
숟가락은 또 어떠한가? 승질 급한 고서방 자기 숟가락 찾을려면 시간 걸린다고
어느날 똑 같은 모양의 스텐레스 숟가락을 열개나 사왔다. 그냥 수저통에서 뽑기만
하면 자기 숟가락이 되도록...일테면 은 숟가락이냐 금 숟가락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뽑아서 늘상 자기가 먹던 숟가락 모양이면 되는 것이다.
좁디 좁은 수저통에 똑같은 숟가락, 젓가락이 열쌍이나 포진해 있다는 것은
고서방에게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다. 생각할 것 없이 뽑으면 자기 숟가락이니까.
그러나 어머님은 여전히 아버님의 숟가락을 은 수저로 꽂아 놓으셨고, 나는 또 나무로 된 것을 좋아하니 나무 수저를 쓴다.
그러다 아이들은 돈까스 먹을 때만은 포크를 써야 한다며 커다란 쇠스랑을 두개 꽂아 놓았고, 커피병의 깊이가 장난이 아니여 꿀 퍼는 손잡이가 길다란 숟가락이 또 하나 추가가 되었다. 이렇게 고스방의 의도와는 달리 숟가락통은 중구난방 개성대로, 혹은 쓰임대로 다시 대오를 정비하였다.
설거지통에는 이렇게 중구난방표 숟가락이 각자의 입술 흔적을 남기며 담겨있다.
그것만 있는가? 냄비며 후라이팬이며 한끼 식사에 드는 도구가 가지가지 열천가지가 된다.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는 개인이지. 그러난 그것은 제 안의 복잡한 구조를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이고, 다음 단계의 기본은 가족이 된다.
가장 규모가 작은 가족의 여러끼도 아닌 단 한끼의 식탁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개성이 존재하고, 우리는 아무 불편없이 그런 것들을 인정하고 살아가고 있다
(간혹 선풍기 깨부수는 그런 일을 제외하고)
어머님이 내가 나무 수저를 쓰는 것이 못마땅 해하시지만, 나 역시 어머님이 조기대가리를 손으로 발라 드시는것이 못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에게 기분 좋은 식사이고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면 인정해야한다.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길 원한다면, 나도 그들의 행동을 이해해야한다
이렇게 지금은 공자님 촛대뼈 까대는 소리를 하지만, 또 언제 이런 수칙을 잊어 버릴 지 알 수 없다. 한계는 늘 생활에 내재된 책갈피이고, 그걸 잊었다 찾았다 하고 사는 것이다. 그게 사람살이이다. 잊었을 때 모가지 핏대올려 싸우다가 그걸 찾았을 때 민망해지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사람 사는게 그려려니...하고 살 밖에
상순
이런 밥상을 차린 날은 뭣인가 직무 유기한 느낌이다
밥상을 차린다함은, 이것저것 반찬을 나열하여 자고 일어난
허전한 뱃속을 채운다는 단순한 의미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의미의 전체가 아님을 안다.
맛이 있던, 맛이 없든 다들 한 술씩 뜨고는 집 밖으로 나간다
나는 식구들이 먹었던 그릇들과 반찬 그릇, 수저등을 걷어서
개숫물에 넣는다
식구 여섯이면 그리 많은 식구가 아닌데, 한 끼의 식사 후에
쏟아져 나오는 빈 그릇의 양은 언제나 개수통에 가득이다.
하나 하나 씻어 엎으면서 들여다 보니 그 모양도 참으로 가지각색이다.
여섯식구 밥그릇도 모양이 같지 아니하니, 먼저 아버님은 옥식기 모양의
스텐레스 그릇이고, 세사람은 약간 원뿔모양을 중간에 잘라 놓은 듯한
밥그릇이고 또 두사람은 원기둥 모양을 중간에 잘라 놓은 모양이고, 밥
양을 줄여가는 나는 아이들 이유식 그릇의 플라스틱이다.
국그릇도 이 밥그릇과 짝이 맞게 하니 또 각각이다.
거기다 떡볶기를 담았던 접시는 둥글며 오목하니 넓적하고, 아버님 무부침개를 담았던 접시는 정사각형의 바삭과자 모양이다. 제사 지내고 남은 조기 구운 것은
타원형의 길다란 접시고, 부침개 전골을 담았던 접시는 턱이 높은 납작한 접시다.
숟가락은 또 어떠한가? 승질 급한 고서방 자기 숟가락 찾을려면 시간 걸린다고
어느날 똑 같은 모양의 스텐레스 숟가락을 열개나 사왔다. 그냥 수저통에서 뽑기만
하면 자기 숟가락이 되도록...일테면 은 숟가락이냐 금 숟가락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뽑아서 늘상 자기가 먹던 숟가락 모양이면 되는 것이다.
좁디 좁은 수저통에 똑같은 숟가락, 젓가락이 열쌍이나 포진해 있다는 것은
고서방에게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다. 생각할 것 없이 뽑으면 자기 숟가락이니까.
그러나 어머님은 여전히 아버님의 숟가락을 은 수저로 꽂아 놓으셨고, 나는 또 나무로 된 것을 좋아하니 나무 수저를 쓴다.
그러다 아이들은 돈까스 먹을 때만은 포크를 써야 한다며 커다란 쇠스랑을 두개 꽂아 놓았고, 커피병의 깊이가 장난이 아니여 꿀 퍼는 손잡이가 길다란 숟가락이 또 하나 추가가 되었다. 이렇게 고스방의 의도와는 달리 숟가락통은 중구난방 개성대로, 혹은 쓰임대로 다시 대오를 정비하였다.
설거지통에는 이렇게 중구난방표 숟가락이 각자의 입술 흔적을 남기며 담겨있다.
그것만 있는가? 냄비며 후라이팬이며 한끼 식사에 드는 도구가 가지가지 열천가지가 된다.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는 개인이지. 그러난 그것은 제 안의 복잡한 구조를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이고, 다음 단계의 기본은 가족이 된다.
가장 규모가 작은 가족의 여러끼도 아닌 단 한끼의 식탁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개성이 존재하고, 우리는 아무 불편없이 그런 것들을 인정하고 살아가고 있다
(간혹 선풍기 깨부수는 그런 일을 제외하고)
어머님이 내가 나무 수저를 쓰는 것이 못마땅 해하시지만, 나 역시 어머님이 조기대가리를 손으로 발라 드시는것이 못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에게 기분 좋은 식사이고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면 인정해야한다.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길 원한다면, 나도 그들의 행동을 이해해야한다
이렇게 지금은 공자님 촛대뼈 까대는 소리를 하지만, 또 언제 이런 수칙을 잊어 버릴 지 알 수 없다. 한계는 늘 생활에 내재된 책갈피이고, 그걸 잊었다 찾았다 하고 사는 것이다. 그게 사람살이이다. 잊었을 때 모가지 핏대올려 싸우다가 그걸 찾았을 때 민망해지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사람 사는게 그려려니...하고 살 밖에
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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