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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곤이에게

황금횃대 2007. 5. 30. 20:20

오늘이 벌써 오월 삼십일인데 네게 보내 줄 달력을 만들지 못했네. 그래서 오늘

포도밭에 일하러 나오면서 색연필과 종이, 그리고 받치고 쓸 두꺼운 공책과

내 필통을 작업주머니 가방에 넣어 가지고 왔지. 이게 만일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라면 내 입은 지금 댓발 앞으로 전진해서 볼썽싸나운 꼴이 되었겠지.

그러나 내가 좋아서 하는 일, 바쁜 와중에도 심중에 오롯 한 사람의 형상과

그 기뻐할 마음을 생각하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래서 사람인게야

 

회곤이도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서 병조에게 편지를 써 주겠지. 나는 그 마음

다 알아. 편지를 써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마음 자락을

가지고 있다는 건 복이지. 그 누가 침범해서 가지고 갈 수 없는 복 말이야.

 

우리지은 천 평 정도의 작은 포도밭이 있어. 작은집에 물려 주길 했어도 대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져오는 땅이였지. 상민이 작은아버지가 농사를 잘 지어서

포도밭은 그리로 넘겼지. 농사 지어 먹고 살래면 사람 심정이 얼마나 다치는가 몰라.

옛날 포도농사 처음 지을 때, 수확기에 비가 쏟아졌어. 매일 밤 차고에

앉아 터진 포도알을 잘라내며 작업을 하는데 졸며 눈 비비가며 작업을 해 놓으면

포도송이가 느슨해져서 상품가치가 없네. 결국 들고 파내던 송이를 파찌통으로

던져 넣으면서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엉엉 울었어.

사람이 살면서 제 노력값만큼 결과가 따라와 주면 그 한밤중에 내가 포도 송이를

붙잡고 통곡을 했겠냔 말이지.

생각만큼 길이 팍팍 열려 주지 않는 것, 그게 인생이야. 살아 보니 그래.

 

점심 먹으러 가기 전까지 편지를 다 써야지..하고 밭둑가에 나와 앉아서 쓰기 시작했는데

밭으로 누가 오는 바람에 그렇게 못하고 이제 해 넘어가 저녁이네.

이제 산 속에서는 해가 저물면 울기 시작하는 낮은 목청의 새가 울겠지.

그리고 청개구리도 어느 물가에 집합을 했는지 일제히 제 목울대를 울리며 합창을 할거야.

그러면 저문 골짝밭에는 포도골 끝까지 그늘이 순식간에 생겨 어둑하고 나는 그제서야

바삐 질러나가던 손끝에 힘을 풀며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거야. 근데 오늘은

밭에서 편지를 마저 쓰야하기 때문에 나무 토막을 궁뎅이에 깔고  다시 앉았네.

 

산판일 하던 사람도 다 돌아갔나벼. 종일 기계톱 돌아가는 소릴 뿜어내며 나무 쓰러지는

소리가 났는데 산 속은 이제 조용하다.

어제 밤 늦도록 상민이와 이야기 했지. 우리의 이야기는 철학적 요소란 눈꼽만치도

없지만 미주알고주알 이어지고 밤은 자꾸 깊어 간다. 공부를 못하고 넙데데 동그라미

얼굴을 가졌지만 딸이 내게 있다는 건 생애 두 번째의 축복이야. 아프고 난 뒤

어린양이 늘어서 가끔 나는 눈꼴이 쉬어터지지만 그래도 이쁘지. 신이 나의

어느 구석을 이쁘게 봤으면 내게 '딸'을 주셨을까. 늘 감사하지.

 

며칠 전부터 '아름다운 총각 회곤이'에게 무슨 말을 해 줄까 나름대로 생각이

많았지. 그러나 논리며 케케묵은 성현의 말씀보다 내 살아가는 이야기가 훨 재미있고

좋을 것 같아. 늘 따뜻한 청년이길 나는 바랄뿐이지. 물론 내 딸도 그러하기

마음 속으로 늘 기도하구. 잘 지내.

 

 

2007년 5월 30일 전상순.

 

 

회곤이에게 저번에 달력 만들어 준것이 오월달까지다

유월 달력을 만들어 딸 편에 보내줘야 하는데 마음이 바쁘고 밭일이 눈에 어른거리니 시간이 좀체

나지 않는다. 오늘 밭에 도구를 들고 가서 퍼대지고 앉아 콘티박스를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종이를

놓고는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쓴다.

 

산판일하는 신랑한테 밥을 갖다 주러 온 수연이 엄마가 갤로퍼를 돌리면서 날 보고 뭐하냐고 묻는다

"어데 편지 쓸데가 있어 집에 가면 시간이 없고 그래서 여개서 쓰고 있구만."

그녀는 남편에게 밥을 내려주고 내게는 음료수를 하나 건넨다.

 

하루 종일 혼자 버둥거려봐야 왔다갔다 포도 세골하면 하루 해가 진다.

사람 인내가 극에 달해 이놈의 포도순을 화악 잡아 뜯어 패대기를 칠까..하는 마음이 치받쳐 올라올때쯤

해가 진다.

그늘만 들어도 살 것같다.

 

 

한지에다 달력 그림 한 장, 편지 두 장 쓰고 나니 걍팍해진 마음이 갑자기 솜사탕처럼 부드러워져설랑.

그려, 내가 쓴 글자는 언제봐도 이뿌구만 히히히.

 

회곤이는 병조에게 공부하는 노하우를 전수하느라 짬짬히 병조에게 편지를 써 준다.

목표로 하는 대학 리스트. 못되도 이 대학 만큼은 꼭 간다는 마지노선.

수능과 내신을 같이 챙길 수 있는 방법.

과목별 공부하는 팁.

참고서에서 문제지까지

188센티 길죽한 그 녀석이 제 글자크기만한 섬세함으로 가지가지 적어서 딸 편에 보내온다.

편지를 받아서 상 우에 얹어 놓고 서이서 머리를 맞대고 읽어보면서

나는 딸에게 눈치채지 못하게 눙깔 한번 굴려서 흘겨준다.

넘으집 자식은 저렇게 똘똘하게 제 앞가림 계획을 잘 세워서 공부하는데

우리집 딸년은 뭐하냐..싶어서. 그러나 그 마음도 잠깐.

상민이는 내가 피곤하다고 하면 설거지 하나는 끝내주게 잘 해준다.

그럼 됐지. 회곤이는 공부 한 가지 잘하고, 상민이는 설거지 하나 잘 하구.ㅎㅎㅎ

 

고서방은 오늘 논에 제초제를 뿌렸는데..

요즘 우리 둘이는 도킹이 어려워 지지고 볶을 일도 없다

그냥..

알아서 쓰러져 잔다.

어이 고서방

뒷골이 좀 무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