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느티나무의 말
김상옥
바람 잔 푸른 이내 속을 느닷없이 나울치는
해일이라 불러다오.
저멀리 뭉게구름 머흐는 날, 한 자락 드높은
차일이라 불러다오.
천년도 눈 깜짝할 사이, 우람히 나부끼는
구레나룻이라 불러다오.
1.미루나무
포도밭 가에 오래되고 큰 미루나무가 있었다. 보름 전에 베여졌으니 이제 과거형이지
시집 와서 포도밭이 되기 전, 다랑지논일 때, 논둑을 깎고는 미루나무 아래서 남편과 점심을 먹었다
나 혼자 포도밭에 일을 하면 바람 불 때마다 한 잎도 가만히 있지 않고 나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냈었다
소난곡 김씨가 느타리종균을 넣겠다고 나무를 달라했단다
포도나무에 그늘이 치인다고 남편은 김씨 손에 미루나무 두 그루를 넘겼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뜬금없이 후라이드치킨과 양념치킨, 이렇게 두 마리의 닭이 배달되었다.
치킨집 사장에게 이게 무어냐고 물었더니 그냥 먹어도 괘안타고 했다.
닭 두 마리를 먹고 난 뒤 밭에 가보니 나무가 없어졌다. 큰 나무가 쓰러지면서 주변은 쑥대밭이 되었다
미루나무가 사라진 뒷 편에는 여전히 산에 나무들이 자랐지만, 갑자기 수문장이 없어진 대문처럼
주변의 낮은 산들이 휑해졌다.
바람이 겨울처럼 을씨년스럽다. 여름이라도 그렇다
수 많은 잎들이 걸러내주던 바람색이 아니라 그런가
무엇이든 사라지고 난 뒤의 풍경은 우울하다.
2.
하이힐을 못 신는다.
무릎의 수명이 얼마남지 않았단다
연골이 물렁물렁해져서 앞으로는 뼈들이 자랄거란다
무서운 이야기다
이년 전 어머님의 무르팍이 찍힌 X-ray를 자세히 본적이 있다
뼈들이 자수정처럼 삐죽삐죽하게 자라있는게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완충장치가 없는 뼈마디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운동화 집에 들러서 낮으막한 신발 한 켤레를 장만한다.
지난 봄에 그것도 모르고 나는 6센티 굽의 신발을 새로 샀었다
신발장 앞에 작은 이층 선반이 있어 새로 산 구두가 거기 얹혀 있다
배암 껍데기처럼 얼룩 무늬가 현관으로 들어 온 빛을 받아 비늘처럼 번득인다
비늘이 번득일 때마다 나의 잔존연한을 생각해 본다.
3.
친정 집 앞 큰 길에 사십층도 넘을 듯한 아파트가 몇 동 들어섰다.
그 앞을 지날 때면 저절로 고개가 하늘로 향한다
한 번도 정확한 층수를 세어 본적이 없다
스물 몇칸을 하늘로 부터 세어 내려오면 스무칸이 채 못 내려와서 눈은 경계를 흐려버린다
그저 스무칸 남짓 세어 놓고는 그 아래를 흘깃보면 세어 내려온 만큼의 부피가 스무칸 아래에 하나 더 있으니 사십층쯤 되겠구나 아니면 그 이상이거나.
삼일 전에는 영화 밀리언달러베이비를 보았고 그 다음날은 이미숙이 나오는 정사를 봤다.
삼일 전 본 영화는 명확히 생각이 나는데 정사는 낮부터 구름이 걷히고 월류봉에 늦은 노을이 반짝
나올 때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안 난다. 심지어 제목은 물론이거니와 주인공도 생각나지 않고 단지 야한 장면이 있었다는 그 기억밖에 떠 오르지 않는다. 그 야한 장면이란것도 구체적이지를 않고, 그 장면이 나올 때 남편이 점심을 먹으러 들어와 후다닥 화면을 검게 만들어 버리는 버튼을 눌렀다는 기억 밖에. 무릎에는 연골이 없어지고 뼈가 자라고, 머리 속에는 기억의 뇌세포가 없어지고 지우개가 자라는가보다. 지우개의 재질은 무엇이지?
4.
남편의 위에 양성종양이 있다고 해서 내시경을 했다
종양은 다행히 위염으로 밝혀졌다.
태어 나서 첨으로 내시경을 한다고 했다
보호자로 내가 들어가 남편의 위장을 들여다 보는 내시경의 시선을 모니터로 본다
붉은 살들, 핏줄, 미끌미끌한 점액들이 화면에 선명히 보여지고, 내시경은 위를 들쑤시며 돌아다닌다
종양 부위를 살펴보다가 집게가 들어가서 조직검사용 시료를 채취한다. 붉은 피가 잉크처럼 번진다.
오늘,내가 없어서 남편은 혼자 결과를 보러 종합병원에 갔다.
몇 번의 전화가 내게 연결이 되었다.
병원에 혼자 간 적이 없으니 두려운게지 그 절차가
말만하면 척척, 접수에 수납에 이리저리 병원 구석구석을 안내해주던 여편네가 없으니 나이 오십이 되어서 난감한게지.
B형간염 항체가 있어서 간이식하는데는 문제가 없단다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진료가 끝나고 내게 통보하듯 전화를 다시 걸어왔다.
문제 없데. 문제 없데. 문제 없데....남편의 말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5.
동대구역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내려오는데 상행 케이티엑스가 출발한다고 방송이 나온다
내가 타고 갈 기차는 십여분 뒤의 무궁화 열차
불현 듯, 무궁화를 버리고 케이티엑스에 올라타고 싶은 욕구가 치솟는다
다리가 주춤주춤 자동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아 내려가고 있다
손은 단단한 벨트부분을 우겨쥐고 발은 주춤주춤 내려가고
기차가 떠난다. 내 발이 바닥에 닿기 전에
휴~ 안도의 한 숨.
아직도.... 이 나이가 되어도, 우발적 충동과 주저앉힘 사이에서 이빨을 깨물어야 하다니.
끌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