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도 안 먹는 고스방

고스방이 느끼는 세월

황금횃대 2007. 11. 7. 21:43

어제밤, 늦게 학교에서 돌아 온 아들놈이 내일 준비물로 한복을 가져 가야 한단다. 한복?

몇 년동안 열어 본 적이 없는 이불장 젤 아래 빼다지를 열어 본다

딸아이 초딩 때 입던 한복, 내 시집 올 때 입었던 웃티, 저번에 북한에서 내려 온 남파 간첩같은 본견 한복, 그리고 남편 한복이 두 벌 보자기에 싸여서 오래 개켜놓은 자욱을 팍팍 내며 들어 앉았다.

한복을 꺼내 놓고는 아들놈한티 입어 보라고 하니 비쩍마른 보리껍데기 같은 아들녀석이 고스방 장가 갈 때 입은 한복을 색이 곱다고 입어 본다. 그러나 너무 크다. 바지는 한 다리에 온 몸을 다 넣어도 남을 것 같은 폭이 녀석을 더욱 보리껍데기로 만들어 놓는다. 야, 안 되겠다 이거 입어봐.

 

옥색 속저고리에 연보라 바지, 짙은 자주보라색 조끼에 마고자까지.

이것은 아버님 회갑에 고스방 형제들이 단체로 해 입고 사진 찍은 그 한복이다.

그 때야 회갑이 참 큰 행사였지. 작은 어머님에 시고모님들, 그리고 아들에 며느리까지 그 계급별로 똑같은 한복을 해 입고 회갑 큰상을 놓고는 뒤쪽에 온 가족들이 병풍처럼 둘러서서 사진을 찍었대지. 나는 그 때 시집 오지 않았으니 땡땡이 무늬의 한복을 얻어 입을 수가 없었다지.

 

                              <<<<<<황간 마산리로 남파된.....ㅎㅎㅎ>>>>>

 

그러니까 아버님 환갑이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이니까 고스방 50에 25년을 제하면 아마 스물 다섯쯤 되었을 때 입었을게다. 아들 놈이 새파란 청년일 때 입었던 아버지의 한복을 물려서 입을 만큼 컷다.

저 한복을 입고 아버님 잔치상에 둘러 서서 사진을 찍을 때만해도 고스방은 꿈이 가을 하늘 만큼이나 높았을게고,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그림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곰같은 여편네를 얻는 일도, 딸, 아들을 낳아 이렇게 부모님과 같이 살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대충 맨 바지끈이 흘려내려 아들놈이 입었던 바지가 쑥 미끄러져내렸다. 졸지에 위쪽은 거창하게 저고리에 조끼에 마고자까지 불룩하게 차려입었는데 아랫도리는 팬티 하나만 걸쳐서 온 식구가 뒤집어지게 웃었다. 그러다 아이들은 제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옷들을 끌어 안고 내 방에 들어 와 다림질을 하는데 잠 자러 들어 오는 고스방 한 마디.

 

"어이구...그 때 저 옷 입고 박꽃같이 웃던 나는 어데가고....(거울을 보면서 쇠어가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자슥놈이 벌씨로 저렇게 커서 그 때 입던 내 옷을 입고 있네."

 

 

고스방, 세월은 뭐 그런거야, 누구든 안 덮어 쓸 재간이 있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