걔는 어떻게 내게로 왔는가
우리동네는 촌구석이라 라디오가 잘 안 나와요. 최근에야 컴으로 라디오 듣는 프로그램을 다운받아서 시방은 컴으로 라디오를 듣고 있지요. 옛날 생각 나나요? 별밤 듣던 시절.
내가 그 프로그램 열심히 듣던 때는 진행자가 이종환이랬어요. 그 능글맞은 아자씨. 음악 다방에 쪽지 적어서 신청음악 넣던 시절이였으니. 요새는 왜 그런 다방 없나 몰라요. 가끔 티비에 명맥을 유지하며 음악다방 하는 곳이 나오더만요 그걸 보면 참말로 세월 잠깐 새 흐른다는걸 실감해요.
가요도 듣고, 팝송도 듣고, 가끔은 클래식만 틀어주는 음악다방에도 가곤 했어요.
대구에서 내가 자주 가던 다방은 이목 다방이였어요. 그 땐 까페나 이런 말도 잘 안 쓴거 같어. 그냥 다방이였어요. 요즘은 다방이래면 그저 오봉에 차 기구싸서 배달만 주로 하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한데 옛날에는 안그랬어요. 그냥 다방에서 얼음커피도 먹구, 쥬스도 마시고 그랬어요. 인테리어가 잘 된 곳, 아니면 성냥갑이 이쁜곳..이렇게 나름대로 다방폴더를 만들어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방을 구분해서 만났지요. 아참, Lethe라는 다방에도 참 자주 갔었어요. 거기는 정형화된 똑같은 의자와 탁자가 아니라 테이블마다 의자나 탁자가 다 달랐어요. 츠자말년쯤인가? ㅎㅎ Lethe에서 이현공단에 있는 못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총각과 미팅을 했는데 내가 썰을 얼마나 열심히 진지하게 풀었던지 그 총각 완전 감동묵어서 내한테 술도 여러번 샀더랬어요. 얼굴이 시커멓고 떡대가 아주 건실한 총각이였는데 어떻게 그래 내 세치혀에 그렇게 넘어 갔나 몰겠어요. 참 그 시절에는 뭘 믿고 구라 땅땅치고 댕겼는지..(밑에 블루언니도 왕뻥을 친다고 하시지만...나야말로 원조 구라쟁이였세요)
오늘, 가입해 있는 소설문학카페에 가서 글을 읽었는데 저기 광주사는 괴얌샘이 올린 글, '동녁은 어떻게 붉어졌는가'하는 글을 읽고 참말로 손가락이 근질글질 했지러. 누구라도 글을 쓰고 싶은 어떤 동기가 있었겠지요? 꼭 문소시절이나 문청시절을 열렬히 겪진 않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쓰고 싶다는 욕구를 다 가지고 있겠지요.
그 새임은 문학반 담당을 맡으면 그 동아리에 들어오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꼭 물어 본답니다. 여태 살아오면서 <상처>가 있었는가 하는. 그 물음에 아이들은 눈을 띵굴띵굴 굴리며 상처가 뭔공? 하는 표정으로 쳐다 본답니다. 그저 모두들 부족함 없이 둥글둥글 편안하게 살아 온 애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결핍, 가난, 부모에게 받은 냉담이나 이혼, 혹은 여자라서 받았던 불평등..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면 전부 대다수가 멀뚱멀뚱하게 앉아서 서로 쳐다보기만 한다지요. 결핍이라..
결핍이라기 보다 우리 때엔 거의 가난이 더 앞서겠지요. 가난했기에 겪어야 했던 여러가지 일들과 갈등, 부딪침..같은 것. 그렇게 가난 했어도 어머니는 아이들을 버리지 않았고, 가난이 지겨워 술로 달래는 시름찬 지아비를 내팽개치지 않았지요. 물론 세상이란 그 때라고 다 착하지 않았고 지금이라고 다 악하진 않습니다.
그 글을 읽고 나는 내 글쓰기의 시작이 어디였나 곰곰 생각해 봤지요. 그 새임은 지금 소설가로, 그리고 학교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나는 뭐 그런 그럴 듯한 타이틀도 없고 그냥 집에서 살림 사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글쓰기, 혹은 문학이라는 것에 나름 애착은 있었겠지요. 나도 뜨게질 하던 손길을 잠시 놓아두고 생각해 봅니다.
기실 학교 다닐 때야 별로 글쓰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어요. 그러나 중학교 들어가 도서관에서 겉장이 너들너덜한 조흔파 새임이 지은 <얄개전>을 읽었을 때 세상에 글이 이렇게 재미있다니. 영어 시간에 그 책을 몰래 읽다가 선생님한테 들켜서 화장실 청소하고 그 책 찾으러 교무실에 가서는 선생님 앞에서 달구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제요. 참말로 순진했습니다. 아니 책 읽다 그렇게 된 걸 무엇이 그리 서릅고 무서워서 염분이 철철 넘치는 눈물을 흘렸단 말입니까. 방과 후 책 찾으러 교무실 가는게 뭔 중죄를 지은 것처럼 어깨가 무겁고 선생님들이 무서웠어요. 그렇게 야곰야곰 책읽기가 시작되면서 글 쓰는 일이 즐거운 일로 인식이 되었을거라. 그렇게 글쓰는 일이 내게로 왔어요.
그래도 그 땐 쓴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냥 공부하고 대충 놀고, 그러다 장녀의 소임으로 아래 남동생 셋을 어찌어찌 뒷바라지 할래믄 나는 대학이란 꿈도 못 꾸고 상고를 갔어요. 옛날에 누가 내가 쓴 글을 읽더니 이 감성으로 우째 주산을 놓고 부기를 배우고 타자를 쳤나고 이야기를 하더만, 그건 다 내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릴게구. 상고 3년 다닐 동안은 참말로 신나게 놀았어요. 최소한의 자격증만 따면 되니까.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고3을 보내는 2%의 사람중에 아마 내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써클활동하는 일도 재미있고 야간부가 있는 학교라 일찌감치 수업을 마치는 것도 좋았지요. 그 좋았던 시절에 책이나 팍팍 읽었으면 좋았을것을 그리하지 못했어요. 그게 제일 아쉬워요. 책도 다 읽을 때가 있어요.
울 아부지는 1녀 3남을 두었어요. 큰딸인 나를 낳고 내리 아들 셋을 쭈리리 낳았어요. 낳긴 뭐 엄마가 낳았겠지요. ㅎㅎ 그렇게 얼라는 너이나 맹글어 놓구선 그 아이들에게 책이나 좀 낫게 사 들이시고 그러시지 왜 화투는 손을 대가지고 집구석에 신문쪼가리 하나 읽을거 없이 살게 했나 몰라요. 울 큰아부지가 슬하에 자슥이 없었세요. 근데 큰아부지는 일본에서 해방 전에 중학교까지 댕기셨어요. 그래서 늘 붓과 먹을 가까이 하시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셧세요. 어쩌다 큰 집에 가면 이런저런 책들이 단칸방 방바닥에 놓여 있어서 그걸 가지고 처마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요. 그 때는 박통 시절이였으니 굴러 다니는게 박통 전기문 같은 책이 많았어요. 그 때가 초딩 3학년 땐가 사학년 땐가...큰아부지 집에서 감자도 읽고 그 외 한국 단편도 몇 편읽었세요. 뭔 뜻인지도 모르고..그냥 글자를 읽는게 좋았응께.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작은 주물회사에 경리로 취직해서 월급받고 일을 했지요. 그 때 또 한번 글이 내게로 왔어요. 같이 졸업한 루피나 수녀님. 박원희가 내게 글을 보내줬어요. 둘이서 열심히 편지를 썼지요. 지금도 흰 종이 터억 턱밑에 갖다 놓아도 겁을 안 내고 당당하게 연필로 쓸 수 있는 것은 모두다 그 때 편지를 쓰면서 글쓰기 습작을 했기 때문일거예요. 그렇게 둘이서 생활을 기록한 글들을 교환을 하고, 글이란게 그냥 현상을 기록하는 것만 아니고 자기의 생각을 넣게 되니까 ..그리고 문장의 아름다움도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조금씩 내 글은 발전을 한 것 같아요.
가끔 친정에 있는 큰 남동생이 나를 측은하게 바라 볼 때가 있어요(얼래 갑자기 눙깔이 시큼하네) 즈그 딸래미한테 고모같이만 하믄 된다고 이야기를 한데요. 고모는 진짜 아까운 재능을 가졌는데 그걸 다 못 펼치고 산다고. 참, 그러고 보니 그 동생 군데 갔을 때도 편지 무쟈게 많이 썼어요. 같은 소대에 근무하던 김병장이 내 편지를 읽고 내 동생보다 나한테 더 답장을 많이 보냈세요. 그 김병장은 내 동생하고 나이가 똑같았지요. 누님누님하면서 편지를 그렇게 써서 보냈었는데 그걸 다 어데다 내삐릿는지 지금은 한 장도 없네요.
그런데 츠자적 자유롭던 그 시절에 소설 써봐야지 하는 생각을 못 했나 몰러요. 소설의 시작은 어디일까.. 내 안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그걸 사부작사부작 꺼내서 스스로 고약처방을 내리고 붕대를 싸매면서 그 상처를 치료하는 일의 시작이 아닐까. 그래서 그 때의 상처를 아물게하고 새로 돋아난 살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면서 세상을 향은 눈길을 더욱 따스하게 건네는 일. 뭐..
옛날에도 이야기했지요. 울 아부지 화투치러 가서 이틀 밤씩 안 들어오면 울 엄마가 우리 재워놓고 스방을 찾으러 나섭니다. 한 밤중에 오줌 마려워서 웃목에 있는 요강을 문풍지를 뚫고 들어 온 달빛으로 찾아 조심스레 오줌누고 난 뒤 어둠이 눈에 익어 단칸방 풍경이 드러나면 대번에 엄마 없는 빈자리가 들어 옵니다. 들고 나갈 것없는 누추한 살림이라도 엄마 없는 자리는 왜 그리 무서웠나몰라요. 잠이 오질 않아요. 동생들이 깨서 엄마 찾으면 어쩌나..그 마음뿐입니다.
새벽 동이 틀무렵 엄마가 먼저 들어오고 아버지가 들어 왔어요. 노름이란게 돈을 딸 때도 있고 돈을 잃을 때도 있어요. 아버지가 돈을 따서 밤중에라도 들어오는 날은 사탕을 사가지고 왔어요. 여섯 식구가 동그랗게 둘러 앉아 아버지가 사 온 사탕을 똑 같이 나눴어요. 그런 날은 화투판에서 돌아 온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 온 전사 같아요. 전리품같은 사탕을 나누면서, 그 사탕을 까 입안에서 도글도글 굴리며 단물을 빨아 먹을 때는 행복합니다. 그런 저런 이야기들.
일 년, 혹은 이 년만 살면 이사를 가야 하던일, 한 울타리 안에 일곱여덟세대가 살면서 때론 쥐어 뜯고, 때론 나눠 먹으면서도 수돗물세 나누는 날이면 누구나 할 것없이 한푼의 액수라도 덜 내려고 악다구니를 하던...그런 겨운 살림 살이들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러다 인터넷이란게 생기고 카페란게 생기니까 살판 났어요.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어도 말로는 다 못 하는 일들이 살다보믄 얼마나 많아요 그치요? 그걸 여기다 주끼대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더 있나 싶었세요. 뭐든 자꾸 하면 늡니다. 타자 속도도 뭐 상고 출신이라 빠르지만 말을 글로 표현하는 일도 훨씬 쉬워집니다.
요새는 손으로 하는 일이 더 많아서 자주 앉아 주끼질 못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언제나 광활한 공간에다 재미있고 깨소금같이 고소한 이야기를 마구마구 하고 싶은게 내 꿈이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