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즉하긋어...
작년 유월 열여샛날부터 쓴 일기장 한 권을 어제까지 다 썼다
오늘 일기를 쓰자며 아이들 방에 들어가 빈 노트 한 권을 꿔오다
결혼하고 쭈욱 일기를 썼으니 결혼 전에 쉬엄쉬엄 쓴 것을 제외하고라도 제법 많은 경력이
일기장에도 붙었다
결혼 할라고 고스방하고 선을 본 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니 만 십육년이 흘렀네
뭐 간간 들여다보면 주로 일월달, 이월달은 일기가 매일매일 착실히 쓰여졌으나, 농사일 시작되고 그러면 건너 뛰기를 밥 먹듯하고 그러다 스방하고 한 판 붙은 날은 구구절절 양의 내장처럼 구불구불 사연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육아일기로 일기의 양상은 바뀌고, 아이가 쌀알같은 이가 나기 시작했다는둥, 설사를 해서 병원에 잠시 입원을 했다는둥, 배밀이를 했네 짚고 일어섰네 돌떡을 쥐고 걸어댕깃네 이런 이야기들만 온통 행간을 채우는 공책이 있는가하면 오늘도 유치원 내일도 유치원 온통 유치원에 관련된 이야기만 있기도 하고, 그 다음에는 슬슬 튀어나오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들.."나는 뭐꼬?"하는
그러다 시절은 시남시남 흘러서 비로서 아이들도 배제되고 스방도 어디론가 떨어져 나가고 오롯 내 이야기가 글줄을 풍성하게 한다
이놈과 연애를 했네 저놈과 연애를 했네 뭐 이런 이야기같으면 훗날 읽어도 너무 재미가 있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몇 건 없고 점점 살어내는 일에 탄력이 붙어가는 나를 발견한다
메주를 딛이고, 장을 담그고, 두부를 만들고, 재봉틀질을 하고 읽고 싶던 책들을 읽으며 시를 쓰기도 하고 주접을 떨면서 글나부랭이를 쓰기도 한다
이 때가 황금시절이다. 아이들은 내 손을 떠나고, 남편은 여편네를 포기하기 시작한다.
날밤을 새우며 채팅한 이야기며 옛날 옛날 한 옛날이라며 시작되는 추억의 쥐오줌 얼룩진 생들을 들춰내기 시작한다. 아무리 깨물어 먹어도 이빨이 안 아픈 가난한 옛 이야기, 아무리 쪽쪽 빨아먹어도 쓴물이 나오지 않는 츠자적 연애이야기, 아무리 꺽꺽 목이 메여도 스방은 눈치채지 못하는 생의 비애를 주저리주저리 풀어낸다.
한 페이지 아니면 겨우 두 페이지 넘어갈려나, 아무도 열어보지 않는 종이짝에도 나는 다 털어놓지 못하는 심정이 있다. 몰래 훔쳐보며 올가슴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글자 이면에 숨겨놓은 배경을 혼자 즐기기 위해 장치를 거는 내가 있다.
훗날....유언장에다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저어기 장롱 위에 얹어 놓은 라면박스 속에 있는 공책들을 내 주검과 같이 묻어달라"
어쩌면 죽어서 아주 심심골때리는 시간이 오면 신비한 혼백의 내공을 끄집어내어 일기장
페이지를 침 탁탁 묻혀가며 혼자 읽고 있을지도 모를일.. 읽다보면 대개는 이런 표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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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이 저렇게 좀 우끼는 것이였으니.
행간의 그림자야 오즉하긋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