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횃대 2005. 2. 26. 11:44
휘영청,

한껏 부풀었다 옆구리가 이틀 기운 달빛을 밟으며 스방과 아들은 제사를 지내러 갔다.

꼭두새벽,

첫 닭 울기 전 향을 피우고 새쌀을 씻어 묏밥을 짓고, 상념없는 절을 올리며 의식이 진행된다. 달은 그 순간에도 천리씩 제 발걸음을 떼어 놓다.

 

 

길가의 나무들이 벗은 그림자를 일렁이며 푸른 물길을 제 몸으로 내는 동안

별들은 가지 끝에 앉아 수만의 밀어를 속삭였으리라. "어찌 아는가" 하고

물으면 "그걸 왜 모르는가"로 대답해 주어도 두 사람 사이엔 아모 충돌이 없으리라.

 

 

봉지에 조상이 먼저 음복한 음식을 싸서 들고 군청색 정맥이 밤하늘에

신경망처럼 산개한 길을 되짚어온다.

담요에 돌돌  말아 데리고 제사를 지내러 다녔던 어린 아들놈은 이제 앞서거니

뒷서거니 에비의 어깨를 부딪치며 박꽃같이 웃는다.

 

 

어머낫, 어머낫, 이러지 마세요. 더 이상 내게 이러시면 안되요

아빠처럼 제 고추에도 털이 났단 말이예요. 아비가 들이미는 손짓에

제것을 손으로 막으며 잽싸게 피할 만큼 어린 자식은 몸이 크고, 생각이 크고.

 

 

아비는 문득 민망타가도 헛,헛, 웃음이 난다

자신의 앞머리칼이 쇠어가고 어쩌다 무릎 관절이 어긋나는 발걸음이 잦아져도 저것들, 저 알맹이들이 알록달록 자라니 속상함도 잊고 심중에 드는 바람도 너끈 견뎌낼 수 있다. 나는 껍데기로 비어가도 자슥놈들이 댕글댕글 알맹이로 영글어주지 않는가.

 

 

대문을 밀치니 앉아 있던 황소가 화들짝 앞무릎을 펴며 일어난다. 달빛은 오래된 콘크리트 바닥을 맑은 물처럼 환하게 비추인다. 느릅나무 그림자가 아랫채 마루 바닥에 드러 눕고, 늙은 돌감나무 가지가 그 위에 엉기였다. 오래된 이 집.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낮고 아늑한 초가집에서 숨결을 거두었고,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내 아버지....숨결이 이어지는 천장에는 숱한 사연도 한약방 약봉지처럼 매달려 있으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환하게 보이는 그 집의 역사 혹은 내력.

 

 

아들놈은 봉지를 부엌 쪽창 턱에다 올려놓고 방으로 사라진다.

묻어온 정월 칼바람이 벗어 놓은 외투에서 톡, 떨어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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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끄고 방으로 와서 편지를 써요

몇 줄쓰니 제사 지내러간 스방과 아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나요.

부산스럽게 현관 계단을 뛰어 오르는 소리,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소리, 신발이 흐트러지는 소리,,, 방에 배깔고 누워 글자를 쓰는데 귀에는 저 소리들이 다 들려요.

12시가 넘으면 시골은 조용합니다.

새들도 제 둥지로 돌아가 노고를 다독이는 시간.

사람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런 싸이클로 살아가는 사람은 대개 아침이 부담스럽지 않은데, 내가 아는 몇몇의 사람들은 지금부터 화들짝 깨어나는 그 무엇에 사로잡혀 밤을 새기도 하겠습니다.

 

문득,

자연스럽게 내 살어온 자취가 가만가만 떠 오르는 날은

밤의 세포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무장무장 검은 꽃들을 피우고 나는 그 중에 한 송이, 나를 보고 웃는 어떤 날, 혹은 사람에게 손과 마음을 내밀어 밤새도록 그것들과 얘기도 한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