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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가을, 혹은 초 겨울
황금횃대
2008. 11. 26. 17:15
아침에는 늦도록 안개가 자욱하였다.
목도리를 두르고 기침을 쏟아내는 입을 마스크로 막고는 길을 나선다
매번 먼길 떠나는 꿈을 꾸지만 나는 한 시간 오십분짜리 길로 들어선다.
비어 버린 들판,
누에고치처럼 돌돌 하얀
수지로 말아 놓은 짚무더기도 다 치워졌다.
서슬푸른 바람이 불어대는 산 모퉁이에는 된서리 맞은 떡깔나무 잎들이 시남고남 달려서 흔들린다.
문득 물 소리가 요란하니 물길이 휘굽어 도는 곳까지 왔나보다
동그란 햇님이 중천에 떠 올랐건만 안개는 쉽게 길을 열지 않는다.
마스크의 입김이 위로 올라가 눈썹에 작은 물방울을 매달아 놓는다.
내 눈썹은 비 맞은 처마처럼 차갑게 젖는다
지난 일요일에는 편재와 영남언니, 그리고 공주와 반야사에 갔다
오랜 만에 들른 반야사에는 작은 전통찻집이 생겼고, 야무진 바느질로 만든 옷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득, 정갈한 옷들을 한 벌 사 입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주머니를 털어봐야 지전 한 장 들어 있지 않는데 나는 자꾸 하얀 윗도리와 갈색 조끼, 그리고 남색 누비바지가
갖고 싶어 만지작만지작한다.
편재의 어깨에 낮게 기대어 사진을 찍는다.
편재는 지난 초여름에 뜨거운 열기를 참아가며 포도순을 지르러 왔다.
그의 아내는 시험이라고 같이 못 왔다.
언제나 따뜻한 온기를 다른이에게 언제든지 건네는 영남언니는 아무리 보아도 내가 따라 잡기 힘든 컨셉이다.
깊어 깊어 이제는 한 고비 넘어간 늦가을 어느 날
반야사 돌덩이 위에 조로록 앉아 웃어 본 날이 있다는 걸
훗날 이 사진으로 기억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