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횃대 2009. 2. 10. 00:41

 

 

 

아들놈은 개학을 해서 학교에 갔다

그동안 너도나도 늦잠을 자면서 아침시간이 느긋했는데 이제부터 그 좋은 아침시절도 다 끝났다.

보름이라 여섯시에 일어나 밥을 하고 나물을 볶고 김을 자르고 두부찌개를 끓이고 생선 조림냄비를 불어 얹는다. 늦잠 자는 딸을 고스방이 방문을 활딱 열어제끼며 오늘은 온 식구가 아침일찍 밥 먹는 날이라며 깨운다

이런저런 풍습을 고스란히 지키며 사는 우리집이 딸아이에게는 조금 번거롭기도 하겠다.

어머님 방에 초석자리를 깔고 음식 장만한 것을 솥째로, 냄비째로 모두 들고 가 자리 우에 놓는다

어머님이 식구수대로 밥숟갈을 솥 안에 꺼꿀백이로 꽂아 놓고 방으로 모여 부럼을 깨물고 귀밝이 술을 먹는다

숙성된 포도주가 혀끝에 은구슬처럼 또르륵굴러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나눔 접시를 가져와서는 반찬을 모두 조금씩 덜어서 상을 차린다. 두레판에 여섯 식구가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어머님은 김을 한 장씩 나눠주며 밥을 싸먹으면 산에가서 꽁알(꿩알)을 줍게 김 싸먹으라 하신다. 고스방이 나물반찬에 젓가락을 가져가니 "나물을 먹으면 밭이 짙는다"하신다. 뭔 이유가 있겠냐. 그냥 예로부터 내려오는 소리겠지. 그러면 대보름에 묵은 나물은 왜 싸그리 다 뒤져서 먹는다냐?

 

아침을 먹고 대충 치우고는 회관으로 갔다. 작년에는 아래,웃마산리 동민이 같이 베꾸마당에서 윷놀이를 하였는데 올해는 너무 주민이 많으니 정신없다며 따로 노신단다. 그러라구 했지만 촌구석 인심도 이렇게 싹막하게 변하나 싶어서 내심 깔끄러운 심사가 되었다. 그러나 어쩌것는가. 놀면서 불편한 것보다 그냥 무난히 넘어 갈 수밖에.

 

회관에 가서 불을 올려놓고는 청소를 하고 걸레질을 한다. 어머님이 매일 와서 다른 할머니들과 지내시니 가끔 나도 청소를 한다. 다 털어봐여 열명 남짓한 할머니들이 모여서 한 나절 놀다가는 곳인데도 파벌이 있고 미운털 박힌 사람이 있고 서로간에 쌍심지를 켜며 으르렁 거리는 사이가 있다. 나는 참말로 이해가 안되는데 노인들은 그런다. 그 여나뭇되는 사회 속에서도 목소리 큰 대장이 있고, 거기에 반항하는 소수의 무리가 있다. 나, 너, 그리고 니, 이렇게 세사람만 모이면 세상의 부조리와 세상의 사랑을 다 보게 된다.

 

청년회에서 찬조한 돈으로 돼지고기 목살을 사고 두부를 네 모 사서 장을 봐온다. 내 생각에는 시레기 푸욱 삶아 돼지등뼈 우려내서 시래기 국 끓여 먹어도 맛있지 싶은데 목소리 큰 대장님이 왜 해필이면 대보름날 시레기국이냐며 목청을 높이는 바람에 쌍둥이 엄마는 마른 시레기 다발을 가져왔다가도 무안해서 실그머니 집으로 다시 가져갔단다.

 

목살 듬성듬성 썰어넣고 목재소 다니는 동하아줌마가 가져온 묵은 무를 썰어 돼지고기 국을 끓인다. 눈꼬리가 질금질금 감기게 익은 김장김치도 두어 포기 넣어서.

돼지고기국인지 다시다국인지 모르게 이것저것 넣어서 푸욱 끓여 놓으면 희안하게 맛있다. 포도나무 전지한 것을 가져다 불을 지펴 큰 솥에 설설 끓이니 가스불에 끓이는 것과는 맛의 차원이 다르다. 에라잇 다시다국이면 어떻고 미원국이면 어떻냐 한 그릇 퍼먹고 윷이나 놀자.

 

사위어가는 불길 우에다 호박고구마 툭툭 잘라 호일에 싸서 던져 놓았더니 그것도 기가막히게 잘 익었다.

화툿장 쭉데기와 오끝짜리로 편을 가른다. 쭉데기팀과 오끝짜리 팀이 혹간 불어 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윷을 논다. 6:4로 쭉지팀이 이겼다. 이긴 사람 상품에는 1200원짜리 치약이 하나 더 얹어진다

그렇게 한 나절을 베꾸마당이 미어터지도록 환호를 지르며 윷놀이를 한다.

좀있으면 농협조합장 선거도 있고, 내년이면 자치단체장 선거도 있으니 뭐라 감투쓴 양반들과 후보들은 꽃보다 더 활짝 웃으며 일일이 악수를 한다.

 

겨우 구름 사이를 삐져나와 노루궁뎅이만큼 짧은 볕 잠깐 하사하고 서산으로 해님이 진다.

회관 마당은 금새 그늘이 들고 좁은 회관 방에서 점심보다 더 간단한 저녁을 먹는다.

 

이제 보름 지났으니 농사꾼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네

내일부터는 이제 방구들에서 송곳이 쑤시는 양 사람들은 밭둑가로 발걸음을 옮길테고, 고샅을 돌아가는 경운기 소리는 탱탱탱, 팽팽한 소리를 뱉어내겠지. 새벽녘 달구새끼들은 한 옥타브 더 높은 봄노래를 부르며 대명천지를 흔들어 깨울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