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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횃대 2009. 3. 18. 16:36

1.

작년에 자두밭에 자두를 다 캐내고 감나무를 심었다. 감나무가 겨울 지나는 동안  몇 그루 죽긴 했지만 잘 살아 주었다. 감나무 심은 골 사이사이에 들깨를 심고, 콩을 심고 참깨며 고구마, 토마토에 대파, 가지....여러가지 작물들을 심어서 심심찮히 따서 먹었다. 영동 주곡리 태초농원에 갔다가 감나무에 감이 달린 것을 보더니 고스방이 욕심이 생겼다. 달린 감이 크기도 크거니와 색깔도 좋아서 작년에 묘목을 부탁을 하였다. 올해 봄이 돌아와 그 집에서 감나무 묘목을 캐서 심으라고 연락이 왔다. 오전 내도록 감나무 200주를 작은 포크레인으로 캐와서 우리 감나무 밭에 욍기 심었다. 토요일이였다, 고스방은 택시를 세워놓고 오랜만에 밭에서 일을 하였다. 무얼 좀 하면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라, 바람이 쌀쌀하게 부는데도 난닝구바람으로 삽질을 한다.

 

우리 감나무 밭은 오랫동안 자두 농사를 지은 밭이라 돌멩이는 별루 없다. 밭살이 팥고물 같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만큼 흙이 부드럽고 좋다. 배수도 잘 되고. 촌에 살면서 그냥 땅 딛이고 밭 일궈 농사 지어 먹고 사는 일이 그냥 아무런 느낌도 없고 '그런게비여' 하면 그걸로 끝이지만, 세세히 무얼 느껴보자고 작정한다면 흙 하나에도 내가 촌에 살 이유를 다섯가지나 끄집어 낼 수가 있다. 권정생새임의 강아지똥을 읽어보면 농부가 길을 가다가 흙덩이를 주워서는 소중하게 가지고 가는 대목이 나온다. 농사를 지어보면 그 대목이 이해가 된다. 길 중간에 거름덩이가 떨어져 있으면 그게 아깝다. 선뜻 주워 오진 못하지만 두어 걸음 옮긴뒤 그 거름덩이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본다. 그러니 밭둑에 우뚝 서 있는 뽕나무에서 오디가 익어 떨어지고, 찔레꽃, 인동덤불에 개불알꽃....이런 무수한 개체들을 접할 때 나름의 느낌을 찾고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촌에서 사는 일이 과히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눈에 번쩍 띄는 네온사인이나 루미나리에 설치물들이 현란하고 눈을 현혹시키지만 한 여름 날망가지에 달린 붉은 자두를 어렵게 따서 바라보면 그 탐스럽게 익은 붉은 빛이 어떤 인공의 빛과 색보다 아름답고 황홀한 색감이란걸 알게 된다. 그게 촌에 사는 재미다. 이제 봄이 슬슬 어깨를 타고 넘고 옆구리를 지나 발 앞에 만장지장 엎어지면 산천이 내놓는 초록의 물결은 뭐라 열 손가락 타자로 표현  하기 힘들다. 거기다 다래나무 여린 순이라도 따서 살짝 데쳐놓으면 빛과 색에 향이 더하여 사람의 오감은 날아갈 듯 몰아지경이 된다. 거기다 흰밥 해서 주물주물 나물 무쳐 한 숟갈 떠먹으면...죽음이지...

 

2. 

그래, 그래서 부흥공업사 할머니가 죽음의 문턱을 가볍게 넘으셨지. 기동이 어려워 대소변을 누워서 해결을 했지만 마지막 경계에서 구순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가볍게 경계를  뛰어넘었다. 마치 열살 계집아이가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가볍게,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렇게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경계를 미련도 원망도 없이 넘어 가셨다. 오후 3시 15분. 할머니는 경계의 저쪽에서 맑은 눈빛으로 이승의 시계를 바라보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흠...내가 참 좋은 오후 시간에 건너 왔구나..오후 새참은 이쪽 동네에서 먹어야겠구먼..

 

돌아가신 부흥공업사 흥배 할무이는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가을날, 새벽에 어쩌다 밭에 가면 그 할무니가 우리집 밤나무 밑에서 밤을 주웠다. 전날 밤 바람이 많이 불었다면 다음 날 새벽에 어김없이 그 할머니가 먼저 우리 밭주변에 나타났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에 먼데서 머리가 하얀 사람이 언뜻 보이면 가슴이 깜짝 놀랬다. 시엄니는 그걸 보고는 집에 와서 이렇게 욕을 하셨다. "이핀네가 머리는 하얗게 백여시같이 해가지구 새벽바람에 넘으 밭에 밤을 주워갈라고 눙깔 시뻘개 설친다."  그렇게 애살바르게 밤을 주워 나르던 할머니도 이젠 가셨다. 더군다나 밤나무도 지난 가을 밭 정리하면서 베어 냈다. 세월은 공간을 휑하게 만들어 놓고 아련한 기억만 심어 놓는다. 여기저기에.

 

흥배씨 할무이 호상은 내가 했다. 부고장에 호상인으로 전상순이란 이름이 찍혀서 삼백여부의 부고장이 돌았다. 부고장을 받은 동네 친구들은 호상자가 내이름인걸 보고 깜짝 놀랬단다. 야들아 놀랠꺼 읎다. 이 동네 룰은 이장이 호상자로 올라간단다...그래도 그렇지 이름 석자 올리기 전에 내한테 기별이라도 해야지..살짝 나는 완장값을 하려다 그까이꺼...하고 만다. 우리집으로 배달된 부고장은 열어보고 바로 내가 태웠다. 울 시부모님 아시면  벨로 안 좋아허시니까.

 

3.

토요일 감을 심고는 늦게 대구 초딩동창회에 갔다. 반가운 얼굴들과 저녁을 먹고 술 한 잔하면서 감나무 심은 노고를 씻고 노래방에 가서 테이블 위에 올라가 춤추고..잘 놀았는데 안경을 어디 벗어 놓았는지 몰라서 안경을 잃어 버렸다. 이런 제길룡. 남자들 술 먹고 핸드폰 잊아뿌리고 지갑 어디 빠잤는지 모른다고 하더만..나도 그 경지에 이를려나. 노래방에, 이차로 들른 오징어회집..다 알아봤는데 없단다. 도대체 어디다 벗어 놓은거야? 분명 노래방에서 나올 땐 안경 끼고 나왔는데. 쩝. 고스방이 모르기 다행이지 알았다간 또 자진모리 소리 한 자락 들을게 뻔하다. 그래도 꾀벗고 놀던 때 동무들 만내고 오니 기분은 좋다. 그래...난 기분파다 쩝.

 

동창 모임하고 늦게 들어갔더니 친정아부지가 대문을 열어준다. 두 시에 들어갔으니...그래도 우리아부지 엄마는 뭐라 안하시고 어서 씻고 자라고 폭신한 이불을 깔아 주고 내일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집에 가야 한다는 딸이 안스럽기만 하다. 세시쯤 잠들어서 살풋 잤는데 엄마가 여섯시라고 깨운다. 아무것도 입맛 안 다시고 가는게 못내 아쉬워서 아부지는 먹을 걸 가져오라하고 엄마는 가스렌지 불을 켜신다. 시간이 바빠서 아무것도 안 먹고 택시타고 동대구역으로 오다.

 

4.

기차를 타고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밖을 내다보는데, 아포 들판에 이르러 해가 뜬다.해는 내가 앉은 좌석 건너편 쪽 창으로 떠오르고, 내가 앉은 자리 차창 밖으로는 기차가 달리는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그림자는 붉은 물이 오르는 복숭가지를 덮치고, 쑥들이 뽀얗게 올라오는 논둑을 순식간에 그림자로 채우고 달린다. 고요한 아침, 몸이야 피곤천만이지만 새아침이 오는 모습을 풍경으로 바라보는 시간은 또 얼마나 행복하고 나른한가. 살면서 가끔 만나는 이런 아침이 매번 생을  새로 산 운동화처럼 산뜻하게 만드는 것이다. 새로 산 운동화의 느낌을 모르신다고? 그럼..뭘 비유로 갖다 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