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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좋은 이야기

황금횃대 2009. 3. 20. 23:02

우리 동네에는 민들레화원이 있어요. 꽃집이래요. 꽃집 주인아지매는 퉁퉁하니 마음 좋게 생긴 아줌마래요

서울 살다가 촌에서 온 총각이 너무 맘에 들어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세요. 이런 저런 이야기는 말구요 그 아줌니랑 나랑은 주민자치위원이래요. 황간면에 면민회관이 있는데 작년에 리모델링을 했세요. 거기 공간이 너무 허옇게 썰렁해서 그 꽃집 아줌마랑 나랑 지원을 받아서 환경정리를 하기로 했세요. 옛날에  학교 댕길 때 신학기 되면 환경미화라고해서 교실 뒷편의 학습난, 소식난, 시사난, 작품난...이라고 뒷벽면을 4등분 혹은 5등분해서 늦도록 환경미화 작업하던 일, 생각나지요.

 

초딩 4학년 때 나는 환경미화부에 소속이 되어 있었세요. 그 때도 나는 글씨를 꽤 잘 썼세요. 붓글씨를 배운 것도 아닌데 초딩 1학년 시작하기도 전에 연필하나는 야무지게 잡아서 글씨를 정자로 참 이쁘게 썼재요. 4학년 때 환경미화부 부장 이름이 이화도였세요. 이름도 안 잊어먹어요. 그 애는 글씨를 참 못썼어요. 글자를 써 놓으면 누가봐도 내 글씨가 이쁘다고 했재요. 그런데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려 낸 그림 밑에 설명을 쓰는데 글씨를 지지리도 못쓰는 화도가 쓰는거예요. 그 애는 12색 싸인펜이 있었어요. 우리 엄마는 그 때 나한테 그런 화려한 필기 도구를 사줄 생각도 안 허셨재요. 화도는 싸인펜이 제꺼니까 글씨 쓰는걸 남한테 안 맡겼어요. 그 때 어린 나이에도 샘이란게 있었나봐요. 글씨 모양은 이뻐도 나는 싸인펜이 없는 누추한 학생이라, 그 너른 뒷면 벽을 화도의 글씨로 도배가 됐는데, 나중에 그녀가 내게 선심이라도 쓰듯 "니도 함 써봐라"하면서 나눠준 코너가 오늘의 날씨였어요. ㅎㅎ

거긴 글씨는 들어갈 필요가 없고, 해 모양, 우산 모양, 구름모양...뭐 이런 모양만 들어가면 되는 거였세요. 나는 그것도 고마와 얼마나 정성들여 그림을 그렸던지..

 

나른한 봄날, 어둑하도록 교실에 남아 색지를 자르고 신문을 오리고, 싸인펜과 매직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던 그 몇 날의 추억이 이젠 다시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면민회관 환경미화를 한다네요. 요즘이야 컴으로 작업해서 실사그림 드르륵 빼서는 판넬에 붙여 아크릴 판떼기 작업을 하지만 옛날에는 잡지책에서 알맞는 사진 찾는다고 눙깔이 시뻘개지도록  그림을 들여다봤재요.

내 누추한 그리기도구 살림도 이제는 형편이 많이 좋아져서 수채색연필이며 파스텔 연필에 그냥 색연필도 몇 통이나 되구요, 수채화 물감에 동양화물감, 그리고 아크릴물감까지 아조 가지각색으로 있고 메탈릭성분이 있는 색연필도 있어요. 그 때, 내가 열 살 가스나일 때 그 때, 울 엄마가 내게 원도한도 없는 미술재료를 사 주셨다면 나는 이런 애틋하고 가슴 한쪽이 저릿한 기억을 간직하지 못했을거예요. 아! 그 장면을 기억하니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져요. 가난해서 그 땐 힘이 부쳤을지 몰라도 무엇 하나라도 그리고 싶은 열정이라든지, 문방구에 가서 색색의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브라자 하나 살 돈을 털어 이런저런 필기구를 살 때, 나는 그 때의 가난이 지금 내 영혼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구나..하고 생각해요.

 

오늘, 꽃집아지매하고 이야기 하기를, 주민자치 프로그램을 굳이 돈 많이 주고 하는 노래강사, 춤강사 부를게 아니고 주민 중에 열정이 있어 그런 것들을 서로 나누는 동호회형태로 이끌어 가자고 합의를 했어요. 물론 이런 취지를 이야기하면 어데서 굴러 먹던 것들이 와서는 박힌돌 빼낸다고 뒤에서 말을 씹어댈지 몰라도, DVD로 영화를 보고, 작은책 글쓰기 모임같은 생활글쓰기 모임을 하고, 노래교실도 노래에 취미가 있는 사람들이 면민회관에 모여 같이 즐겁게 노래하는 프로그램이 됐으면 좋겠어요. 만약 글쓰기 모임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몇 있다면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과 같이 하면서 마음 속에 서리서리, 아흔 아홉발 명주실타래 같은 마음 풀어 놓는 글쓰기모임에 동참할거예요..

 

이렇게 마음 맞는 사람이 있어 꿈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이 어찌나 귀한지요

부드러운 바람 부는 봄밤입니다^^

 

 <아래 사진은 작은책 글쓰기 모임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