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아침
아, 참 오랜만에 아침부터 비가 내립니다.
어제 장 떳습니다.
물하고 소금, 그리고 메주 덩이가 들어서 몸 풀기 수십일.
메주는 물과 소금을 먹고 맑은 간장을 내놓았습니다.
메주는 다라이에 따로 떠서 마른 메주 불린 것과 치대서 꼭꼭 눌러 장독에 담았습니다
서 말을 물 잡아 장을 담았으니 꼭 그 만큼의 바가지 분량으로 가마솥에다 장을 퍼담아 가스불 안 딩기고
나무로 불을 땠습니다. 작년에 가죽나무 잘라 놓은 것이 단단하게 말랐어요. 그리고 오래된 표고목도
가져다 불을 땝니다. 각대기(박스종이)를 넣어 불을 지피고, 작은 나무가지를 모두어 밑불을 살립니다.
밑불 위에다 이제 장작을 갖다 얹어요.
비가 잦지 않아 마른 장작은 화력 좋게 불기운을 뿜어댑니다.
마른 장작이 화력 좋다는 말이 괘히 나왔게요.
불 피우는 아궁이 앞에 앉았으면 바느질 할 때와 심사가 같습니다.
좀 가느다란 작대기 하나 집어 들고 부지깽이를 만듭니다.
이리저리 불을 쑤석거리다 보면 부지깽이에도 불이 붙어요
그럼 흙 속에다 부지깽이를 쑤셔박으면 금방 불이 꺼지고 매캐한 연기가 담배연기처럼 피어 올라요
장작불의 천적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쑤썩거림` 입니다. 가만히 놓아두면 소록소록 타올라 나중에 바람 한 줄기 아궁이로 몰아쳐주면 불기운은
삽시간에 확 오릅니다.
사람이 참 그래요.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으면 그거 하고 싶다는 식으로, 밑불 지펴 장작에 불이 잘 안 붙으면 눙깔에 눈물 철철 흘리며 아이고 불이나 좀 잘 붙지..하며 주뎅이 댓발 나와 씨부렁 거리며 각대기를 더 넣네, 화르륵 타는 신문지를 넣네..하면서 불 지피기 바쁜데, 불길이 정상 괘도에 올라 잘 타면 부지깽이며 사람이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럼 좀 심심하지요. 서 말 장물은 끓을라면 아직 시간이 좀 더 있어야지요.
그러니 자연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불을 자꾸 건드려요. 공기구멍 만들어 준다고 숯처럼 벌건 아랫구석을 좀
쑤셔 줍니다 ㅎㅎ 그러면 차곡차곡 'ㅅ' 자 형태로 포개 놓아 잘 타고 있는 장작이 피리릭 무너져요. 기실 장작
이래야 몇 동가리 안 얹어져 있지요. 그럼 불이 순식간에 확 줄어들고 연기가 콸콸 나오는거예요.
그럼 무방비에 연기 들어마시고 눈 따굽고..
이렇게 불하고 장난을 치면서 장을 다려요.
"올해는 어째 장색깔이 맬건 콩나물국색이라 좀 낫게 다려야겠다"
뒤안에서 불 때고 있는 내 뒷편으로 어머님은 무릎걸음으로 오셔서 훈수 두십니다.
나도 간장색이 너무 맑아 좀 많이 달여야겠구나..속 짐작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시네요
넘하고 내하고 이렇게 생각이 맞으면 이심전심이라 카면서 박수치고 그러는데 시어머니하고 내하고 이렇게
한 생각을 하면 못땐 며느리 상순이는 어떤 생각하는지 아십니껴?
'어이구 어련히 알아서 헐까바 어머님 그러셔요' 이럽니다. 아조 못땠지요? ㅎㅎ
장을 다 달여서 오짓독에 붓고 뚜껑도 깨끗이 닦아서 잘 덮어 놓습니다.
장은 이제 제 2의 숙성의 길을 걷습니다. 제 2의 인생길 장도에 오른 간장에게 박수...짝짝짝..
간장도 이렇게 거듭거듭 납니다. 사람이야 뭐 말 할 것도 없시요.
내가 첨 시집와서는 엄니가 이렇게 장을 떠라, 저렇게 장을 달여라, 이렇게 퍼부어라..수십가지의 주문을 하셔도 그러려니..하면서 아무 까탈이 없었세요. 근데 거듭거듭 거듭거듭 잘못 거듭났는가. ㅠ.ㅠ
어제 그렇게 장 달여서 장꽝까지 깨끗이 씻어서 행주로 닦았습니다.
그거 별거 아닌거 같아도 저녁에 허리 펴고 누우면 우두둑 아이고 소리가 저절로 나와요
그런데, 오늘
그렇게 깨끗하게 씻어 놓은 장꽝에 비가 내립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립니다. 빨래 돌려 놓고는 밖에 나와 있는 건조대를 서둘러 접어 방구석에 갖다 놓습니다.
뒷마당에 나가니 봄은 이제 저멀리 가고 초여름이 와요.
나뭇잎이 그렇게 말하고 꽃이 그렇게 말하는겁니다.
뿌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새 가죽 나무 순
뿌리를 캐서 술 담궈 먹으면 다리뼈 아픈데는 그럴 수 없이 좋다는 골담초
비물을 맛봐야 토실토실 올라 오는 표고 햇표고만 저렇게 하얀색이지요
저걸 똑 따서 대충 먼지 털어내고 쌩으로 베어 먹어도 향기가 참 좋지요
취나물과 터줏대감, 터줏대감은 췻덩 향에 취해서 ..홍알홍알.
이런 날은 가죽새순 뜯어서 장떡을 굽고, 취나물 순을 뜯어다 쌈을 싸고, 골담초 꽃을 받아다 꽃떡을 찌고
아름답고 순한 사람들과 대낮부터 막걸리 한 사발 하는 겁니다.
비 온 다음날은 옥수수를 심고, 열무씨를 뿌리고, 제법 자란 전구지를 베어 내고 비료를 흔쳐주고, 상추씨가 제대로 올라왔나 뒷짐지고는 상추밭을 둘러 보고, 심은 감나무에 새순이 모조리 이삐게 났는가 그것도 휘휘 한바퀴 휘저으며 돌아보고, 어데 눈먼 두릅 순이나 있으면 똑 따오고...그러는 겁니다. 그렇게 살면서 또 한번의 봄을 거듭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