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횃대 2009. 12. 10. 13:40

 

 

 

 

1984년 마을 규약을 만들어 내라고 해서 옛 종이를 찾아나섰습니다. 켜켜 먼지 쌓인 낡은 문방구에서 괘선지를 천 원주고 한 권 샀습니다. 옛날 팔십 년도 때 친구에게 편지 쓸 때 이 종이를 많이 썼더랬습니다. 팔팔한 이십대 초, 그 때.

 

넘으 돈 벌어보겠다고 새벽밥 먹고 공장으로 서릿발을 부러트리며 출근하던 시절, 사회의 모순에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닭똥같은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지만 나 역시 모순의 실체가 되어 부모님의 가슴을 후덜덜 떨게 만들기도 했지요. 갑자기 아련해지면서 공단 골목골목이 기억 속에 떠 오르기 시작합니다.

 

친구 rufina 수녀님과 편지를 할 때도 이 종이를 많이 썼어요. 일곱장, 여덟장 씩이나 풀어낼 사연이 그 때는 자주 있었나봅니다. 그 편지들을 모아서 친구는 내게 건네 주기도 했는데 그것도 나는 어디다 두었는지 기억이 안나요. 그것도 이 종이처럼 가장자리가 커피색으로 변해가며 늙어가겠지요.

 

아직 김장을 안 했어요. 정신 없이 일들이 계속 일어나서 그랬지만 어른들은 못마땅합니다. 차고 안에 배추는 뽑아다놓고 밍그적거리고 있으니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으시겠지요. 나는 내 요량이 있어 그 안달을 모른 척, 합니다. 목요일에 슬슬 시작해보려구요. 늦은 김장이지요?

 

사람이 종이 한 장으로 옛 추억을 떠 올리 수  있다는건 참 축복이지요. 겨울은 시작되었지만 그렇게 춥지는 않습니다. 또랑물이 껑껑 얼고 강둑 저너머에서 얼믐 깨지는 소리가 우르렁거리던 그 옛날 겨울은 없어요. 어릴 때 아버지 손 잡고 낙동가을 얼음 위로 건너던 생각이 납니다. 발걸음 옮길 때 한번씩 강은 싸나운 소리를 내며 먼발치에서 우리 쪽으로 소리로 달려 올 때 나는 무서워 아부지 손을 꼭 잡았고, 아부지도 내 손을 꼭 잡았어요. 아부지도 나처럼 무서웠던게지요. 그 대 울아부지가 막 서른을 넘겼을라나 조금 더 있었을라나.

외갓집.

경북 달성군 다사면 죽곡리..

외갓집 큰집에 큰애기가 시집가는 날이였어요. 잔치를 보고 엄마는 더 있다 오고 나는 아버지 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였어요. 엄마는 옆에 없고 강은 와락와락 울어 대고 밤은 깜깜하고.

 

차암 오랫동안 그 날의 풍경은 기억이 되고 더러는 세월 속에서 각색도 되었겠지만 아버지와 내가 동시에 서로를 의지하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던 그 순간은 고스란히, 가감없이 기억하고 있어요.

 

오늘 아버지에게 전화 드리니 세상에 걱정은 멀리 있는 양 목소리가 맑고 기분이 좋으십니다. 나는 이런저런 일로 힘이 좀 들었었는데 아버지 목소리를 듣고 금새 좋아졌습니다. 엄마는 옆에서 "순이가 보내 준 군고구마 냄비에 고구마 맛있게 구워 먹고 있다고"자꾸 얘기하라고 아버지를 다그치십니다. 아버지가 안전해 주셔도 엄니 목소리가 커서 다 듣겨요.

 

2장의 편지를 쓰고는 젤 윗편에 있는 편지 번호 쓰는 곳에 1, 2라고 각각 써넣습니다. 이런 행동도 옛날에 똑같이 하던 거예요.

이 편지를 받아 읽는 사람도 물론 모양은 다르지만 옛날의 기억을 떠올릴테지요. 추억이란 그런거니까.

 

이장일을 맡아보니 바쁘고 신경쓰이는 일도 많습니다만 연말에는 선진지견학이란 명목으로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제주도 들러 한라산 정상에도 올라갔다 왔어요. 1900고지 올라가서 구름이 발 저 아래 있는 것도 봤지요.

즐거운 산행이 아니라 엉겹결에 정신없이 산을 올라 하산 시간에 쫒겨 허둥지둥 산을 내려왔어요. 장장 여섯시간 반을 귾임없이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게요? (미쳤지 미쳤어 운동화 신고 눈길에 빙판 길에...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그래도 정상등반인증서를 받고 나니 뿌듯하데요.

 

자..오늘 이렇게 편지보내면 연말 안부는 이럴로 끝이지 싶은데 그대도 열심히 한 해를 보냈으니 새해는 더욱 환하시라. 건강도 아울러.

 

 

                                                      2009년 12월 9일  전상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