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김장記
목요일에 김장을 시작하겠노라 동네방네 괌을 질러 놓구선 정작 목요일엔 달랑 황석어젓 대가리 떼서 물 부어 삶아 놓고, 뽑아다 놓은 배추에는 눈 한번 흘기지도 않았지. 내가 좀 그려.
종일 비도 구질구질 내리고, 농협에서는 동네사람 나눠주라고 달력을 백 이십부씩이나 가져와 좁아터진 집구석에 부라놓고 가버렸다.
아버님은 저누무 달력을 어떻게 나눠주냐..하며 연신 걸구친다는 듯 눈길을 보내시며 한 말씀 잊지 않고 하시기에 할 수 없이 그걸 동글동글 뭉쳐서 길다란 비닐포장지에 넣었다. 대형달력(그러니까 음력까지 나오는 달력)을 돌돌 말아본 사람은 알지 쇠부분을 단단히 말아쥐며 참참히 말다보면 손바닥에 느껴지는 달력의 묘한 차가운 기운. 그게 뭐 어때서? 하고 물어보면 뭐...할말은 없지만서두 나는 매번 달력 말 때마다 느껴지는 그 찹찹한 기운이 매우 좋다. 이게 좋은 이유를 들라면 다아, 겨울이 겨울 같잖게 따뜻해서이다.
그렇게 황석어 대가리만 잘라 놓구선 금요일 아침에는 배추를 절였다. 쪼맨한 목욕탕 의자 팍 엎어 놓고 앉아서 90포기를 대번에 따개서(쪼개서) 수도간으로 옮겨 소금물에 절인다. 아버님이 거들어 주실려고 왔다갔다하시는데 나의 몸놀림은 거의 작전지역에 침투한 스파이처럼 민첩하다, 믿거나 말거나.
배추 절여놓고 포장을 딱 덮어 놓고선 저녁에 한 번 디비주면 된다. 밤새도록 들락거릴 필요없이 나는 배추와 소금물을 믿고, 그들은 또한 나를 믿고 견디며 하룻밤을 넘기면 된다.
그렇게 배추가 절여지는 시간에 속재료를 준비하고 김치냉장고 몬스터잡기 놀이를 하면 된다.
김치냉장고 김치통에는 무엇이 그리 많이 들어앉았는지 배 따갠 멸치부터 들깨가루,콩가루 찹쌀가루같은 가루 3종 세트에 정력을 위한 천마, 작년 겨울 곶감, 호두살까지..건강보양 3종 세트까지 빠지지 않고 구비가 되어 있다. 거기다 꼬리곰탕 육수에 돼지감자 장아찌...종류로 치면 자그마한 반찬가게 하나 채려도 될만큼 많이도 들앉았다. 거기다 김치통 4통 분량의 냉동실겸용 보관구역은 고스방이 수시로 사다나른 물오징어와 가기각색의 떡들이 깽깽 얼어 있고 초록,노랑,주황의 알세트까지..참말로 먹는 일에 필요한 가지각색은 입이 모자라 말을 못한다. 우린 언제부터 이렇게 복잡하게 살게 되었을까.
다음 날,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배추를 씻는다. 어젯밤, 그러니까 배추와 내가 서로 믿으며 밤을 보내기로 한 날은 고스방 옆에 누으니 내가 괜히 꼴려서 고스방을 집적거렸다. 아프다는 핑게로 고스방이 그동안 몸을 너무 사렸나보다. 즉각 반응에 나선 고스방의 서비스가 저 하고 싶어서 할 때와 좀 다르다. 비풍초칠 똥삼팔 갖은 비기를 다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은 밤이였다. 그렇게 깜박 홍콩 중심부까지 갔다와서 고스방은 신나게 자는데 나는 너무 좋아 놀랬는가 잠이 되깨여서 눈이 말똥말똥하다. 옆에서는 신나게 코골고 자는데 혼자 깨어 이걱정 저걱정 임꺽정까지 다 걱정되는 밤을 지내보라 얼마나 미치고 폴딱 뛸 일인지..
그렇게 혼자 뒤척거리는데 어디서 굴러 먹던 개미새끼가 내 허벅지를 깨물었다. 기겁을 하고 일어나 치마를 걷어부치니 마악 활동을 시작한 개미산이 내 살을 파고 들며 부풀어 오르는게 눈에 보인다 이런 제길룡
한 시간 정도를 개미산과 혈투를 벌인다. 개미산은 가만히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자지러질듯 짜릿함으로 공격을 하고는 또 잠복한다. 이건 잠 안 오는것 보다 더 미친다.
그렇게그렇게 밤이 제 길을 밟아 동쪽으로동쪽으로 발길을 옮길 동안 걱정과 개미산과 싸우던 나도 깜박 잠이 들었나보다. 알람이 울려 일어나니 여섯시다.
배추를 어지간히 씻어가니 입에서 씹은 물이 넘어 온다. 배추가 잘 절여졌나 두어개 배추잎을 떼먹었더니 그 소금기가 입안에 맴돌며 소태맛을 토해낸다. 그 때 고스방이 나온다. 물 장화를 신고 새벽에 배추씻는 여편네를 보니까 좀 안됐는가 거들어주는 척을 한다.
"에고.. 사탕이 방에 있을라나, 입 안이 소태처럼 쓰네.."했더니
"에이 여편네, 혼자서 잘 하다가 나만 보면 입이 쓰네 허리가 아프네 엄살이야"
"엄살은 무슨...한 시간째 배추 꾸부리고 씻어봐요 저절로 그런 소리 나오재.."
그러더니 차 안에서 뭘 찾더니 드롭프스를 까서 가져온다.
그대들도 아시겠지 길다란 막대모안에 속이 옴폭 들어간 링모양의 드롭프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한 인증샷
이 사탕을 두 개 입안에 넣어 준다.
새콤 달콤한 사탕국물을 넘기면서 생각한다. 그래그래 부부란 무엇인가 이렇게 한 번씩 생이 소태맛일 때
서로가 서로에게 새콤달콤 사탕이면 되지 않을까. 거기에 불고기가 뭔 필요이며 진주목걸이가 무슨 소용이랴.
사탕을 다 깨물아 먹어도 어금니 홈에 끼인 사탕잔해로 인해 오래오래 단물이 스며나오는. 뭐 그런기 부부가 아닐까.
배추를 다 씻어 콘티 박스에 담아 놓으니 잠시 손님을 태우러 나간 고스방이 고무장갑 두 켤레를 사가지고 들어와서는 경사진 곳으로 배추를 옮겨준다. 그러니 물이 더 잘 빠진다.
"여편네야, 내 시키는대로 해봐 손해 볼게 뭐있나.."
저런 자신감은 또 어데서 오는걸까 ㅋㅋ
늦게 양념을 개놓고 속 넣을 무도 채칼이 고장나 손으로 다 썰어 담아 놓고 미나리는 고스방이 씻어 주고
.....이렇게 준비가 끝이 났다.
어제는 동갑친구가 와서 흔쾌히 일을 도와서 그 많은 배추를 다 버무리고 돼지고기 수육으로 점심을 먹는다.
으으으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음
바로 이맛이야!
하루종일 김치통에 심부름에 부랄에 요령소리 나도록 쫒아다닌 병조 입에서 나온 말.
이로써 배추 뽑아다놓고 끙끙 앓기만 하던 시부모님의 근심을 한 방에 날려 보내고 김장을 마쳤다는.
들리는 소문에, 영동군에서 우리집이 젤 김장을 늦게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