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횃대 2011. 1. 24. 16:15

예년에는 눈을 기다리는 축에 속했는데 올해는 어찌된 셈인지 눈 하나는 실컷 구경하라고 사흘들어 눈이 내린다. 왠만하면 아랫채 양철지붕 위의 눈은 다음 눈이 오기 전에 말끔하게 녹아 붉은 녹을 드러내며 겨울 흐미한 햇살을 짧게 받아내다  다음 눈 올때까지 말갛게 있기 여사인데, 올해는 그것도 맘대로 안 되는지 본채 그늘이 끼인 곳에 먼저 내린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또 새로 눈이 쌓여 마치 근심 덩어리를 얹고 있는 냥 밝지가 않다.

 

매일매일 끼니 차려내는 일이 녹록치 않다. 어른들이 계시니 맨날 국 끓여대는 일이 일 년, 삼백 육십 오일 걱정이다. 동태국, 시레기국, 미역국, 북어국, 닭개장에 쇠고기국, 삼대 구년만에 끓여 보는 옛날 돼지고기국에 가끔 김치넣은 라면국까지, 국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끓여서 보름 남짓의 싸이클로 돌려대지만 그래도 국 솥에 내용물이 1/2만 남았으면 다음 끼니의 국 걱정을 아니할 수가 없다. 내 전생에 국밥집 딸도 아니였을 터인데 이생에 이렇게 국 걱정을 해야하는 까닭이 어디있을까..더 큰 시름이 없으니 이것도 한 가닥 시름에 속한다.

 

낮에는 오징어 국을 끓여 볼라고 무를 깎아 한 토막 삐져놓고는 큼지막한 제주 무 두개를 좀 크다 싶게 깍둑 썰기를 하여 다라이에 쓸어 담았다. 제주 무는 엷은 녹색과 흰 색이 아주 이쁘게 그라데이션 되어 색 못지 않게 맛도 좋다. 도마 밖으로 튀어 나간 토막 하나를 주워 입에 넣으면 배처럼 단물이 츠르릅 흐른다. 그 무에다가 굵은 소금을 한 주먹 뿌려두다. 아직도 김장김치는 반도 먹지 않았지. 설도 쇠지 않았는데 아삭한 맛이 사라지고 슬슬 무른 느낌이 드는 간이 배였다. 아버님은 신 김치를 좋아하고 아바이는 또 덜 쉰 김치를 좋아하니 밥상 우에 지겨운 김치가 두 보시기나 자릴 잡았다. 나야 두 보시기가 되던 시 보시기가 되던 김치 한 가지로 잘도 먹을 수 있지만 먹는 것과는 달리 차려 내는 일은 조금 틀리다. 그 반찬이 그 반찬인 겨울 상 보기는 깻잎장아찌, 무우말랭이, 무 장아찌, 가죽장아찌처럼 모다 짠 맛이 속속들이 벡힌 것들을 주루룩 차리다보면 그냥 내가 먹기도 전에 질리는 것이다.

 

절여 놓은 무를 씻어 건져 놓고 물기를 빼는 사이 마늘을 찧고 파를 다듬는다. 날씨가 추우니 이렇게 살짝살짝 들어가는 당파도 한오큼 사자면 비싸고 깐마늘 사다 놓은 것도 실실 무르고 곰팽이가 피기 시작한다. 한참에 다 먹을 수가 없으니 속수무책, 그러다가 마늘 봉다리 소쿠리에 꺼꿀러 엎어 손질해서는 다 찧어 통에 담아둔다.

무에 양념을 버무리고 맛을 본다. 새우젓을 좀더 투하해서 비닐장갑에 묻은 양념 국물 맛을 보니 조금 짭쪼름하다. 며칠 전 김천 아포순대집에서 순대를 사왔는데 거기에 딸려 온 깍두기가 맛있는가 어머님은 연신 젓가락을 헤작거려 무를 건져 드셨다.  나는 그것도 여사로 안 보인다.

 

오늘 저녁차로 상민이가 집으로 돌아온다. 고깃집 알바를 시작해서 좋다 하였는데 요즘 구제역 때문에 장사가 신통찮아 알바일이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려 했으나 여의찮은지 뭉개고 있었는데 즈그 아부지인 고스방은 맨날 전화해서 집으로 안 오냐고 졸라쌌는다. 어깨 주물러달라고.

할머니와의 관계가 나보다 더 편편찮은 상민이는 오기 싫어하는데 즈그 아부지가 졸라싸니 어쩔 수가 없는가 보따리를 쌌다. 가끔 고부관계보다 손녀와 할머니의 관계가 내색하지 못하는 나쁜 상황으로 몰릴 때가 있는데 상민이는 아무리 내가 <그러지 마라>하여도 쉽게 누그러뜨리지 않고 까칠하다.

 

날은 추운데 달구새끼 모시도 사러가야하고, 세금도 끊으러 가야하고...

나가긴 나가야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