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1.
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하나.
졸창지간 어머님이 아야 소리 한 말씀 못하시고 너무나 가볍게 이승의 경계를 풀썩, 넘어가신 이야기를 해야하나
엄마 잃은 아이처럼 목 놓아 울던 울보 고스방 이야기를 해야하나
어디 그 동안 쌓인게 고운정만 있을끄나..시어머니 상에도 눈물을 아껴아껴 뽑아내던 요 며칠간의 기맥힌 내 이야기를 해야하나
가슴 속에 이야기는 이미 사리가 되어버린 것부터 핏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몇 시간 전의 이야기까지 서리서리 가슴에 쌓였는데
막상 그 안에 것을 끄집어 내려니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 이왕 사람의 일이란게 이렇게 겪어져 버린 것, 그것을 되돌려 어찌어찌 되었다고 리플레이를 시킨들 무엇하랴. 이미 망자는 변명이나 이유를 설명할 통로를 막았고, 나 역시 내 힘으로는 그 막힌 소통의 숨구멍을 다시 뚫을 재간은 없는 것이니..
그렇게 시어머니 상을 순서에 맞게 치뤄냈다.
그저께 삼우제를 지내고 지장사 절에 어머님 영정을 올려 놓고는 어찌되었던 어머님은 편한 세상 가셨네요 하며 수 차례 절을 한다.
2.
황사가 오기 시작했다
철둑 비얄에 제비꽃이 방가로를 개업하기 이전에 반갑잖은 봄손님이 오신다.
말갛게 보이던 먼산이 희뿌연한 황사에 가로 막히고, 미처 뽑아 내지 못한 울음이 울대에 막혀 하루 종일 쉰소리를 뚫느라 켁켁 거리고 있을 즈음, 내동무 동기에게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모임인걸 잊었다. 갈 수 있으리라 생각도 못했기에 잊었다.
동기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에 날 픽업하려고 전화를 했다. 서방한테 말도 안 한 상태라 선뜻 오케이를 못하고 고스방한테 전화 하여 막차로 올라 오겠다는 언질을 주니 흔쾌히 갔다 오라고 한다. 나는 정말이지 한글 단어 중에 <흔쾌히>란 말을 좋아한다. 아니아니 사랑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무엇이든, 생의 순간순간을 흔쾌히 넘길 수 있는 내가 되자고 나는 쵸코볼을 씹으면서 맹서를 하기도 한다.
흔쾌히는 <자유롭다>는 말의 같은 뜻 다른 말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내게는.
3.
김치 줄거리부분을 송송 썰고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아버님 저녁을 준비한다. 동기는 선산을 지나고 있는 중이란다. 중부내륙을 타면 김천에서 황간으로 되올라와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동기는 <가뿐하게> 우리 동네 입구까지 다시 올라왔다. 나날히 생활의 부자재값이 치솟는 현실에서 이러한 배려는 눈물겹다. 운전하는 동기 옆에 앉아 나는 스타킹을 열심히 보면서, 간간히 하품까지 양념으로 곁들이며 대구로 온다.
마음은 급한데 신천대로는 더디게더디게 길을 내어준다.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 들어간다.
4.
해철이는 참 오랜만에 다시 봤네. 식당 현관 앞에서 전화를 하고 있다. 언제였던가, 멋진 해철이가 은빛 머리칼을 단정하게 쓸어 넘기고 모임에 첫 참석을 했던 그 겨울. 해철이는 그 동안 주름살 한 올 안 늘리고 온전한 모습으로 통화를 하고 있다. 반갑다, 오랜만이네 해철아..이렇게 인사하면 굳이 주거니 받거니 오랜 시간 술잔을 나누지 않아도 나는 해철이가 공유한 우주와 뜻깊은 일별을 나눈게다.
식당안에 들어가니 반가운 얼굴들이 있다. 영원한 내 밥 인윤이도. 듬직한 회장님 인호, 그리고 광기, 향란, 정숙,....일일이 이름을 열거하지 않아도 얼굴만 보면 반가운 이들. 배가 고파 얼른 맥주 한 잔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 오고가는 이야기가 저 내장 끄트머리에 꼭꼭 숨어 있던 오래된이야기가 아닌들 어떠리, 밝은 얼굴로 웃어주며 술을 권하고 잔을 부딪는 순간이 천국의 앞마당인걸.
5.
형신이가 봉투를 전해준다. 눈이 부시게 하얀 봉투이다. 어머님 장례에 가보지 못했다며 화환을 보냈어야하는데 연락을 못받아서 그랬다며 봉투를 준다. 미안하다. 내가 하도 정신이없어 친척집 연락하기도 바빴다. 어머님이 그렇게 내게 한 마디 말씀도 안 하시고 가실 줄 어떻게 알았겠냐. 고맙데이.
아홉시가 슬금슬금 넘어가고 있다. 벗어 놓을 패딩조끼에 팔을 집어 넣으며 작별인사를 한다. 그냥 손 내밀며 악수하는 그런 인사 말고..순창이도 안아주고, 인윤이도, 인석이도...
예전에는 몰랐지. 품에 안는다는 그 따뜻한 의미를.
나이는 그저 흘러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6.
동대구역에 도착하니 기차 출발 시간보다 삼십분이나 일찍 왔다. 아버님께 드릴 찰보리빵을 한 곽 사고, 단숨에 마셔버린 몇잔 술이 서서히 말초신경과 실핏줄까지 노크하는 기별을 느낀다.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좀 외로왔나보다. 시간만 조금 더 허용이 된다면 참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텐데...내 속에 쟁여놓았던 아롱이다롱이 사연들을 봄기운에 녹아 내리는 얼음짱처럼 녹여 응어리진 것이있다면 뭉글뭉글하게 혹은 몰랑몰랑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텐데. 아쉽고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7
집이 가까와지자 기차 안은 휑하도록 손님이 없다. 대전이 종점이라 더욱 그렇다.
깜깜한 밤을 마주한 차창은 거울처럼 내 얼굴을 비추고 있다. 온갖 잡티와 주름, 그리고 숨은 걱정들을 말끔히 거세하고 윤곽을 보여주는 검은 거울.
마주하고 눈웃음 나누던 시간은 다시 올 것이고, 나는 또 그 자리에서 환한 얼굴로 웃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