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흰죽 쑤는 쌀을 씻으려면 이남박보다 질그릇 옹배기가 좋았다.
옹배기에 대고 쌀을 문질러 씻을 때, 손에 너무 힘을 주면 부서지기 쉽고, 힘을 안 주면 잘 씻기지 않으며, 대강 씻으면 나중에 죽이 거칠었다. 그 조그맣고 흰 쌀날 한 톨 한 톨이 입고 있는 겉껍질 엷은 옷만을 홀랑 벗겨낸 속쌀이, 그 몸을 하나도 상하지 않은 채 깎인 데도 없이 연한 살을 부드럽게 드러내며 오돌오돌 살아 있게 씻어내는 일이 어디 쉬운가.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죽에서 진미가 고소하게 우러나고, 맛에 힘이 있으며 먹고 난 다음에도 쌀의 진기와 속기운이 든든하게 남았다.
죽이라고 해서 싸래기로 쑤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곱게 닦아낸 쌀을 대여섯 시간 넉넉히 물에 불려서, 눈에 안보여 그렇지 볼 수만 있다면 그 쌀 한 톨 한 톨의 단단한 켜가 뭉쳐 있던 힘을 풀고 저절로 벌어져, 수백 수천의 흰 꽃잎 일어나듯 벙글어 난만해지도록, 그 켜켜가 벌어져 갈피마다 숨을 쉬며 너울어지도록 두었다가 , 밥을 지을 때보다 대여섯 배 정도의 물을 더 부어, 반투명으로 기름이 자르르 돌며 잘 퍼질 때까지 쑤는 흰죽.
"제대로 쑨 흰죽은 고기보다 살로 간다."
혼불 7권 80p
녹두죽을 쑤었다.
처음 짓는 논농사에 일주일을 논매기만 하다가 친정아부지는 이가 솟굴리어 뭘 씹지를 못하신다
더불어 시아부님도 틀니와 잇몸사이에 염증이 생겼는가 진지상을 받으면 인상이 구겨진다.
아침 설거지를 하며 맷돌에 타놓은 녹두 서너오큼을 물에 담궈 첫물에 둥둥 뜨는 껍데기를 따뤄 내고 다시 물을 붓기를 서너번
그래도 녹두껍질은 쉬이 벗겨지지 않고 녹두살과 더불어 머뭇머뭇 아래로 가라 앉는다. 녹두색, 올리브빛
점심 때 되기 전에 다시 한 번 물과 껍질을 따뤄 내고는 푸르륵 한 번 삶아낸 녹두를 믹서기에 갈았다.
작년, 철둑 비얄에 녹두 농사를 지은 원구네 아줌마에게 녹두 한 됫박을 사서 녹두죽에 도전을 했는데 실패를 했다. 그 땐 시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다. 내 생애 처음 끓인 녹두죽을 받아 들고 시어머니는 지청구를 녹두죽 한 사발 보다 더 많이 쏟아 내었다. 서너 숟갈 뜨다만 녹두죽 사발을 내가 속울음을 삼키며 긁어 먹었다. 그께잇꺼 한 번 잘못 했으면 다음에 잘 끓이면 되지...하는 마음으로 나를 다독거렸지만 그녀르꺼 죽 한 사발이 내게 주는 비애감은 생각외로 컷다. 어머님 살아 계실 동안에 내가 죽을 끓이면 성을 갈지...(부득부득) 눈물로 속엣것이 얼룩져도 내가 끓인 죽이라 먹을 만했다
원래 시어머님은 죽을 좋아 하들 않으셨다. 마른 반찬 오독오독 씹어서 드시는 걸 좋아 했지, 그러니 나는 더 이상 <죽 잘 끓이기> 노력을 하지 않았다. 국만 주구장창 끓여대었어. 그러다 어머님은 다시 죽 한 사발 나한테 못 얻어 드시고 세상을 버리셨다.
한소끔 푸르륵 끓어 오른 녹두를 찬물을 더해 갈아 채에 걸러 앙금을 받는다, 오돌도돌한 쌀방티에 쌀 한 오큼을 넣고는 쌀의 겉껍질을 때끼낸다. 뽀얀 쌀뜨물을 따뤄서 모아 놓고 또 쌀을 때껴서 탑탑한 쌀뜨물을 받아 낸다. 이러기를 서너 차례하고 나면 쌀은 그야말로 많이 불지도 그렇다고 건성 씻기만 한 것도 아닌 쌀이 된다. 그걸 글로 표현하려면 어렵지. 그러나 혼불의 작가는 그걸 저렇게 글로 끄집어내 놓았다.
쌀을 참기름에 볶아 짜지허니 솥바닥에 눌어 붙기 전에 쌀뜨물과 앙금물을 붓고 젓는다. 죽을 끓이는 일은, 생쌀 때기는 일이 오할이요, 저어서 골고로 쌀을 퍼지게 하는 일이 또한 그 나머지 오할의 일이다.
찬찬히 저어 주는 일.
눝지 않게 솥바닥 구석구석을 찾아 다니며 긁어 주는 일
몇 번이나 뜨거운 쌀알을 손가락 우에 얹어 놓고 퍼진 정도를 가늠해 보며 젓고 또 젓는 느린 음식 죽.
그렇게 아모 움직임없이 한군자리에 서서 죽을 젓다보면 별별 생각 다 나지..
절대 잊힐리 없는 첫번 녹두죽 쑤었던 날, 더운 여름 후둑후둑 떨어지는 땀을 훔치며 콩죽 쑤던 날, 가을 콩죽은 먹어도 봄 콩죽은 안먹는다는 머슴의 말을 전해 주시던 어머님의 억양, 그 만감의 생각들이 어우러지는 죽 쑤는 일
한소끔 뜸을 들인 쌀알을 마지막으로 두올 손가락 위에 올려놓고 문때면,알맞게 퍼진 투명한 몸살을 터진 껍질 사이로 조금씩 보여주며 그야말로 꽃처럼 피어난 하얀 쌀들이 마음을 환하게 한다. 소금 간을 하고 사기 그릇에 퍼서 살짝 식힌다
두 아버지가 와서 호물호물 죽을 드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