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구만.
대제일여상 16회 졸업생인 그녀와 나는 한 지역으로 시집을 왔다. 그녀는 키가 150에서 20밀리미터만큼 모자라고 나는 165센티미터에서 20밀리미터 더 자랐다. 둘은 고딩시절 주구장창 붙어 다녔다. 학교 후문에 붙어 있는 일미당 만두집에서 무우말랭이를 잔뜩 넣은 통만두를 먹을 때도, 성진문구점에서 희멀건한 떡볶기 국물을 납작만두 우에 끼얹어 먹는 순간에도 같이 있었다. 그녀가 와이엠씨에이 건물 3층 학원 사무실에서 경리를 볼 때 나는 두어집 건너편에 있는 아루스 빵집에서, 빵 따로 고기 따로, 야채 따로 나오는 햄버거 빵을 먹으며 두어 시간쯤 여사로 기다렸고, 내가 다니는 하꼬방 주물공장 사무실에서 일요일 일직 근무를 나오면 그녀는 캠프헨리 맞은편 남도국민학교 담장에 붙어 살던 삽짝을 열고 제 3공단 동산양말 옆에 있는 내 근무지로 쵸코파이 한 통을 사 들고와 하루 종일 둘이서 그 한통을 다 먹으며 갓 시작한 사회생활을 고달픔을 종일 이야기 하였다.
세월은 이런저런 사건사고와 사연을 만들며 흘러갔고, 그녀는 그녀의 시누이 될 사람과 그녀의 언니가 산격동 어느 아줌마 방에서 고스톱을 치다가 서로 나는 남동생 있다, 나는 여동생있는데? 로 시작한 맞선으로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으로 시집을 왔다. 나는 새로 산 랜드로바 앞코가 터실터실하도록 비포장 길을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신혼집에 뻔질나게 들락거렸고, 그녀와 같이 사는 시어머니가 나를 친정조카에게 소개했다.
그렇게 붙어 다니던 친구가 심심촌빨 날리는 촌구석으로 시집을 오자 나도 고만 거름 한 짐 지고 장으로 간다는 식으로 그녀의 외사촌 아즈버님이던 고스방과 덜컥 결혼을 해버렸다. 나이 스물 여섯, 그 때의 패기만만으로 치자면 이세상 어떤 인간도 내가 맞춰 살수 있으리라는 빛나는 자만감이 허벅지를 지나 대퇴부에서 종아리쪽으로 수시로 흐르고 흘러 넘치던 때였다.
자, 각설하고
즈그도 포도 농사 쪼매 지으면서 내가 몇 날 며칠을 포도밭에 매여 허덕거리는걸 보고는 우리집 일을 거들어 주러 왔다. 젊은 그 시절, 지 머리카락 하나 못 만지게 날 윽박지르며 차돌멩이 같이 야무지던 그녀가, 포도담은 콘티 박스를 들고 나를 때마다 무릎이 아파 아고고 소릴 내고, 하루 종일 포도 작업하면서 허리가 아파 인상을 자주 찡그린다. 그러면서도 박스 나르랴 포장하랴, 이리저리 날뛰는 내가 안스러운지 듬뿍 딱한 느낌을 가득 담은 눈길로 나를 쳐다본다.
나도 그녀가 포도송이에 집중하는 사이 그녀가 성스럽게 생각하는 그녀의 머리칼을 쳐다본다. 제법 흰머리가 있어 이젠 염색을 하는.
우린 하루 종일 포도작업을 하며 서로가 알면서 서로 모른채하며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살을 관통했던 추억을 되새김하며 서로를 곁눈질하고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