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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여편네 일기

황금횃대 2012. 11. 14. 10:38

날씨가 하, 수상하니 무를 뽑았다. 작년엔 무씨를 잘못 사서 무 한 개가 베개뭉테기만해 정이 가들 않했는데, 올해 무는 동실동실 껍데기도 매끈한 놈이 한 번에 한 개 먹기 딱 맞은 크기로 자랐다.  땅 파서 파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비닐 봉다리 넣어서 옥상방에 넣어 두면 딱이겠다. 이젠 넘치는 살림도 싫다. 그저그저 딱 맞는 살림살이가 좋다.

 

개중에는 또 모양이 희안한게 있어 그런 건 한 다라이 쓸어담아 무말랭이로 썬다. 무말랭이, 갱상도 식으로 말하자면 오구락지 무침은 고스방이 아조 애호하는 음식이다. 떡국을 먹을 때나 묵밥, 만두국을 먹을 때 오독오독 소릴를 내며 쫀쫀하게 씹혀주는 그 맛을 고스방은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무만 뽑아오면 그거 좀 썰어 널으라고 사정사정이다.

 

무를 씻어 저장할 것은 올려 놓고 작은 무 한 다라이를 가지고 와서 보재기를 펼쳐놓고 썬다. 큰 무를 썰면 각도가 나오는데 이녀르꺼 작은 것은 반드시 한 귀퉁이에 곡선을 품고 있다. 고스방은 옆에서 무의 꽁지뿌리를 칼로 오려내고 내게 넘겨준다. 참말로 격세지감 아닐 수 없다.

 

어머님 살아 계실 땐 둘이서 늦은 밤까지 무를 썰고, 그걸 또 무명실에 꿰었다. 무목걸이처럼 길다랗게 꿴 썬 무는 보기보다 무거웠다. 그걸 밤 늦도록 꿰면 괜히 부애가 치솟아 올랐다. 하나, 하나, 하나, 하나...끝도 없이 이어질  하나 꿰기의 진수는 무엇보다 실꿰기다. 한 발이나 되게 실을 잘라 바늘에 꿰어 어머님 하나, 나 하나 들고는 무하나 바늘에 찔러 실 끄뜨머리까지 데려다 놓고 다시 꿰고..그러다 서너개를 바늘에 꿰어 실 매듭쪽으로 이동을 시킬라치면, 부애난 마음에 그게 곱게 내려갈리가 없다. 가다가는 뚝, 부러져 무가 떨어지는 것이다. 촌구석 처마 밑으로는 쉴새없이 우풍이 넘나들고 찬 무를 그렇게 두어시간 주물락거리다 보면 손끝이 시린법. 무 하나 부러질 때마다 에이 씨발...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소리는 저절로 나와도 어머님 앞에서 뱉을 수는 없는 일, 목젖이 아푸도록 억지로 삼킨 수 많은 씨발들은 내 속에서 발아 해 까닭모를 분노로 키워졌다. 지금 생각하니 다아..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무 꽁다리를 따서 주던 고스방이 한 마디 한다. 낮에는 나가서 돈 벌고 밤에는 마누래 일 도와주고...상머슴이 따로없네 그랴.... 혼잣말 비슷하게 나 들으라고 중얼거린다. 마침 티비에는 울랄라부부인가 하는 드라마를 보내주었는데 신현준이 바람 피우다 들켜 마누래한테 팽 당하고 친구랑 술마시며 펑펑 우는 꼬라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하는 대사.

"마누라 하나 잃는게 전부를 다 잃는 거라구 으흐흐흐흑" 신현준의 짤아쌌는 대사를 순간 외워서 고스방한테 되돌려준다.

"저 봐, 저 봐, 마누래 잃으면 전부 잃는데잖여, 진작 잘 하지...여편네한테 새대가리라고 내지를 땐 언제고 꼬라지 하구는 ㅉㅉㅉ.." 나으 끌끌거림은 무를 써는 내내 계속 되었다. 고스방도 내게 얼마전 등신아~~ 하고 말한 적이 있기에 그걸 염두에 두고 나도 몇 번을 되뇌였다.

젠장, 나는 왜 이리 자잘한 복수에 목숨을 거나.

 

밤은 깊어가고 또각또각 나무도마 위에 칼날 부딪는 소리는 오래 지속 된다.

"나는 무를 썰테니 고스방은 이 바늘로 무를 꿰시옷!"

불 꺼놓고 오래 오래 묵은 이야기를 나도 한 번 해 볼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