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견디는 법
1.
길죽한 고무다라이에 배추를 다시 절였다. 너나 없이 김장을 할 때는 시간이 없어 절임배추 육십킬로그램을 사다가 친정식구들 호출하여 김장을 졸창지간 해치웠다. 그러고 난 뒤 날이 호되기 춥기전 급하게 밭에 가서 농사지은 알도 차지 않은 배추를 몽땅 뽑아왔다. 대충 다듬어 창고에 넣어두었더니 육십킬로그램의 김장이 모자랄 것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고스방이 알도 덜 찬 배추를 절여 김장을 한 번 더 하자고 한다. 에잇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사람 소원이야..하고 그러자했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아직까지도 오롯 1번만을 지지하는 고스방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선뜻 대답을 한 것이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배추를 봉다리봉다리 담아 옮겨 부엌에서 배추를 절였ㄷ. 딱 반 다라이가 된다. 그러고는 아직 날도 덜 샜는데 투표를 하러갔다. 일등하려고 했는데 못하고 몇 사람 앞세웠다. 선거기간 내내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그 남자의 이름 옆에 붉은 도장을 꼭 찍고 바람에 훨훨 말려 접어서 투표함에 넣고 왔다.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2.
연말모임은 그 전달 모임 회비를 밥도 먹지말고 모아서 대전에 있는 괜찮은 부페집에서 하자고 했다. 그래 토끼띠모임 친구들 여섯이 대전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맨날 예식장 식어빠진 뷔페만 먹다가 별천지 같다. 점심을 먹고 영화까지 한 편 보자고 했으나 결국 시간이 맞지 않아 보지못하고 터미널 쇼핑몰에서 차시간까지 눈요기만 하다가 집으로 왔다. 투표 마감시간까지 2차 김장 준비를 한다. 무을 갈고, 마늘과 생강을 갈아 양념을 후리고, 배추를 씻어 건져 물을 빼고 골파를 다듬어 썰고......개표가 시작 되었다.
3.
땡, 하자 출구조사 발표를 한다. 띵~ 뭔가 한 대 얻어 맞은 듯하더니 갑자기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배추 대가리를 칼로 오려내는데 손이 떨린다. 그럴리가...에이 출구조사잖아..오차범위내라는데 뭐...아무리 나를 안정시키려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얼굴이 달아오르기까지 한다.
김치통 빈통을 옆에다 나란히 줄세워 놓고 배추를 치대기 시작한다. 붉은 양념들이 설 절여진 배추잎에 처덕처덕 발라지기 시작한다. 텔레비전의 목소리는 다급하다.꼼짝하지 않고 양념을 치대 한 통 다 담을 때까지 내 다리는 세워진 각도 그대로 요동도 없다. 귀는 온통 거실의 티비에 열어놓고.
그런데 이게 뭐야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어데 있단말이고...아무리 이를 부득부득 갈아도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방송은 유력이라는 딱지를 눈치볼거 없이 갖다 붙인다. 머리가 깜깜해지고 속은 타들어간다. 그래도 손은 양념을 덜어내고 배추에 치대고 새통에 차곡차곡 무섭게 김치들을 쌓아놓고 있다. 눈물이 흐른다. 이런 기가 차는 개좆같은 경우가 있단말인가.
이를 악물고 참는다. 김치를 다 담고 다라이를 씻고 남은 양념을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작은 통에 치밀하게 옮기면서도 손의 움직임과는 달리 속에는 불이 난다.
4.
씻고 들어와 이불 속에 가만히 들어가서 모로 돌아누워 숨죽여 운다. 수건을 이빨로 깨물고 운다. 마음은 대성통곡인데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룻밤 꼴딱 선잠에 울음에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띵띵부었다. 이제부터는 견뎌야하는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