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횃대 2013. 1. 3. 11:44

 

 

분홍과 보라색으로 시작하는 새해

연말 대선 이후 동네총회까지 이어진 마음앓이에 아무 것도 쓸 수가 없었다.

일 년을 벼루어 온 사람들이 일제히 물어 뜯기 시작한다

그래도 마산리 시계는 열심히 재깎거리며 돌아가고

자고 나면 눈이 쌓이고

또 자고 나면 얼음이 얼고

하룻 밤을 더 보태면 눈바람이 불기도 했다.

어쨌던 나는 어깨가 무거웠던 이장질을 내려놓았다

속이 후련하다.

 

 

휴가 나온 병조도 부대로 돌아가고

마지막 날을 친구들과 보내기로 약속이 된 상민이도 대전 자취방으로 가고

눈 때문에 돈 벌이가 쏠쏠한 고스방은 빙판길 운전에 어깨 근육이 뭉쳐도 기분이 좋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신 아버님까지

집은 절간같이 고요하다.

이 얼마나 오랜 만에 맛보는 내 안의 적막인가.

 

따뜻한 방바닥에 배깔고 누워  무현이가 보내온 시집을 읽는다.

 

[사소한, 아주 사소한 발견]

 

원무현

 

암컷이 체력을 비축하고 있다

새끼를 낳기 위해, 수컷을 잡아먹고 있다

아직 볼 것이 남은 눈알을 먹고

아직 갈 곳이 남은 날개를 먹고

아직도 꿈과 이상이 펌프질 하는 심장을 먹어치운다

 

(뭐 그다지 놀랄 일 아닌 부류는 곤충학자 뿐만 아니다)

 

순산한 암컷,

지아비는 안중에 없고

새끼가 있는 새로운 가정 위에

더듬이를 내려놓고 엎드린다

등을 덮고 있는 긴 날개가 미사보처럼 반짝인다

고요와 평화가 깔리는 풀밭

밀려오는 하오의 나른함

 

이건 틀림없이 사마귀의 세계다

 

그리고 몇 편을 더 읽는다.

 

책을 덮고 가계부 한 켠에 그려진 나팔꽃을 따라 그려보고는

대량 생산에 들어갔다.

 

한 번만 그려보면 영 잊을 수 없는 나팔꽃 그리는 법

 

올 한 해는

생이 아침마다 피어나는 나팔꽃같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