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받아 쓴다
늦게까지 곶감 작업을 하다가 옥상방에서 나와 쪼브당한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발끝이 발발 떨린다. 달빛도 가늘한 초승에는 더욱 그렇다. 고스방은 저녁 먹고 올라가서는 곶감 타래에서 곶감을 따놓고, 9시 막차 손님 받고 들어와서는 또 곶감을 상자에 담으러 올라 온다. 박스며 띠지들이 널부러져 있는 방에 혼자 앉아 곶감 표면에 검은 작은 반점들을 예리한 가위로 잘라내는데 그 땐 내가 마치 성형외과 의사같다. 거뭇거뭇한 반점을 마치 박피먹이듯 얇게 잘라내는데 그걸 잘라내면 곶감은 깨끗한 얼굴을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다. 성형외과 의사의 보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대리만족을 해본다. 점을 빼고 광대뼈를 깎고, 심지어는 턱뼈까지 분리해서 브이라인으로 갈아내고 다시 맞춰 넣을 때 돈이라는 절대 목적 외에도 미적 성취감이 없다면 어떻게 그 일을 해낼까 잠시 생각해 보는것이다.
가끔은 고스방이 아홉시 막차 손님으로 장거리 손님을 받을 때가 있다. 촌구석의 밤이란 너무도 조용하여 고양이 발자욱 소리도 자칫하면 들킬 정도로 고요한데 그 고요를 찢어발기며 철로에 기차 달려가는 소리가 듣긴다. 어떤 기관사는 벡지로 기적을 울려 감껍데기 박피에 심혈을 기울여 몰입중인 여편네를 깜짝 놀래기도 하는데 그 자슥은 죄없는 표정으로 마구마구 남하든, 북향이든 제 갈길을 달아나는 것이다. 그러다 어데 숫고양이와 암고양이가 뭔짓을 하다 긁혔는지 앙칼진 비명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지랄도...
그렇게 혼자 앉아 곶감 작업을 해서 바구니마다 크기별로 담다보면 벼라별 생각이 다 나지를. 그러니까 서방이 옆에 앉았으면 생각조차 꾸셔놓고 발설하지 않는 옛날의 분방한 생활이 꾸역꾸역 생각나는 것이다. 분방한 생활이라고 해야 머 별거 있나 서방에게는 말 못할 츠자적 연애했던 일들이지, 이놈은 지금 뭐하고 살고 있나, 저놈은 또 어떤여편네 만내서 살고 있나...하는. 어떨 땐 내 여섯살 때 울엄마가 둘째 동생 낳았던 범어동 하천가 낡은 집의 쪽마루까지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것이다. 단칸방 뒷문을 열면 부엌으로 나가는 쪽문이 있고 쪽문을 내려서면 부엌 바닥을 에워싼 탱자나무 울타리엔 논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사정없이 부뚜막으로 엮어 들던 그곳 말이다.
그 때 여섯살 나는 몹시 어렸을터인데 엄마가 둘째 동생 상철이를 낳으며 질러대던 고함 소리까지 다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러고는 평생을 가도록 그 집을 생각하면 탱자나무 울타리, 울타리 사이사이로 보이던 얼음 얼어 있던 논바닥, 거기서 옆방 강희네가 이사가면서 중고로 울 엄마에게 팔고 간 오백원짜리 나무 뒤주, 강희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 뒤주는 오래오래 우리집에서 쌀 한 가마니 부어 놓을만큼 생활이 빤해졌을 때까지 함께했었지. 아, 그 때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하는 노래도 작은 쪽마루에 앉아 부르던 기억도.
그러게...사람은 하루에 한번 쯤은 이런 고요 속에 몸을 가만히 놓아 두는 것은 괘안은거 같어. 막걸리 양재기 부딪치며 라보라보 부라보를 외치는 것도 머 나쁠 건 없지만 저런 한밤중의 가라 앉는 고요, 혹은 첫 새벽의 깨어나는 고요 속에 있다보면 가라앉은 맑은 물에 콧털이 다 보이듯 제 마음의 속속들이들을 빤히 불 수 있어 그게 또 오랜 시간 쌓이다보면 무슨 일 닥쳤을 때 잘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될거 같다는 생각도 해보구.
오전에는 경로당에서 노인회 총회가 있었네. 작년 일 결산을 보고 장부에 얼마가 남았으니 이걸로 또 새해 살림 잘 해보자구..하며 노인회장이 경과 보고를 하면 젊은 여편네 몇은 봉사겸 회관에 나와 생콩 갈은 것으로 콩비지장을 끓이고, 얇게 썰어 온 돼지고기를 양념에 버럭버럭 재워 사이다 한 컵 과감하게 부어 지글지글 볶아 내고, 먹다남은 미역 초무침을 작은 그릇에 옮겨 담고, 나박김치도 할아버지 상에만 놓아 드리고,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을 앞앞히 한 그릇씩 떠다 놓고는 다 같이 점심을 먹네. 우리도 십년이나 이십년 후면 맞딱뜨릴 풍경 앞에 미리 흡수되어 콩비지장에 서로 숟갈을 부딪치며 밥을 먹는다.
아흔 둘 되시는 울 아버님도 노인회회원으로 참석하시어 자못 진지하게 결산 보고를 들으신다.
오후에 청소를 하는데 선길이란 놈이 전화가 왔다.동네 안쓰는 컨테이너 창고를 작년 12월 물류단지조성 하청업체 사무실로 한 달에 이십만원 받고 임대를 했는데 그걸 가지고 걸고 넘어지는것이다. 누구한테 물어 보고 임대를 했냐는둥...임대료가 너무 적지 않느냐는둥, 전기요금도 임대료에 포함하면 어떡하냐는둥...대답을 하는데 자꾸 지랄을 하기에 괌을 질렀다. 니가 뭔데 내가 세세하니 다 말해야하느냐고. 임대료 이십만원 받는다고 얘기하면 됐지 전기료며 수도료며 그딴건 왜 얘기해야하느냐고.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는 창고 한 칸 빌려주면서 임대료를 백만원 받겠느냐..고. 아, 이 신발놈이 어찌나 사람 부애를 지르는지 입에서 욕이 저절로 튀어나오려하네. 저는 동네 땅 임대료도 아직 입금 시키지도 않았으면서....에이 개씨발놈.
또 혈압 확 올라가네 ...젠장.
얼마나 많은 한밤중 고요와 깨어나는 새벽 고요를 맞이해야 저런 신발놈하고 얘길하면서도 고인 물처럼 잔잔할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