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주 동맹 여편네

사이 사이의 이야기 1

황금횃대 2014. 9. 25. 21:21








칠월 열하룻날이였다.

포도 봉지 싸기 품앗이까지 끝내고, 우리집 포도밭 추가 봉지까지 알뜰히 싸고 난 뒤, 아픈 허리 치료를 위해 한의원에 간 날이다.

왼쪽 허리 아래쪽이 무던히 아파서 걸을 때 나도 모르게 허리가 꾸부정하고 엉덩이를 뒤로 빼며 걸었다.

덜컥 겁이 나서 작정을 하고 땡볕을 걸어 덥고 불쾌하고 불편한 걸음으로 한의원까지 와서 한참을 기다린 뒤 침을 맞고 부황을 떴다.

치료가 끝나고 바깥에 나오니 기운이 하나도 없다. 평상시 지나 다닐 때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저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지 아니면 기운에 부쳐 앉아 있었는지 풍경처럼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들의 형편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날 알았다.


한 발 떼 놓을 힘도 없이 앉아 이십 수년 전 이 길 우에 처음 발걸음을 떼 놓던 때가 아른아른 생각이 났다. 그래, 그 첫발걸음으로 인해 나는

이곳 황간에서 붙박이 장롱처럼 살아 가고 있다.  원촌리 사는 친구가 시집을 이리로 와서 절친이였던 내가 그 친구 보러 대구에서 기차타고

역에 내려 역과 길 사이의 낡은 계단을 내려와 처음 나선 한 길.


길 건너 붉은 지붕 모퉁이는 중앙 약국이였다. 머리가 벗겨진 힘 없는 노인 약사가 조춤조춤 짧은 발걸음을 약장 앞으로 옮겨 가며 약을 조제해 주던 곳이였다. 노인 약사가 세상을 버리고는 한 동안 비워졌다. 그러다 선거가 있으면 후보자 대형 사진이 걸리는 임시 선거 사무실이 됐다가 선거가 끝나면 다물어진 노인의 입처럼 샷슈 문 너머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허공이 먼지를 쌓으며 침묵했다.


저 가게집 두번째와 세번째 기둥 사이 앞에는 공중전화 박스가 있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집에서 할 수 없는 전화는 없어진 공중 전화 박스에서 통화했다. 동전이 딸그락딸그락 떨어지는 소리에 신경을 쓰며 통화가 길 때는 백원짜리를 한 주먹 쌓아 놓고 통화를 했다. 공중전화와 통화 하면서도 세상의 관계들과는 따뜻했다. 대화 말미에는  "이제 동전이 없어 전화를 끊어야겠다"라는 멘트가 자주 등장했다. 거슬러 받을 수 없는 남은 금액에 대한 미련도 상당해서 몇 푼 남은 것을 뒤에 통화하는 사람에게 넘겨주느라 수화기를 걸지 않고 전화기 위에 뉘여놓았다.

누구나 잔돈의 혜탹을 한 번쯤 누렸는터라 누구든 남으면 나처럼 그렇게 수화기를 올려 놓았다.

이제 그 공중전화도 흔적만 남았을 뿐 몸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행복장수원은 털보 서씨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이 한다. 장수원을 하다가 어느 날 보니 그는 오피러스를 타고 부동산을 한다고 했다. 포도즙을 짜고 찌꺼기를 운반하던 고무장갑 낀 노동의 손은 이제 다른 방편의 삶을 찾았다. 털보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님처럼 개인택시를 했다. 그러나 아버님처럼 오래 하지는 않았다. 그 할아버지도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행복장수원을 지나 황간 우체국도, 황간 지구대 건물도 새로 지워졌다. 예전 사진을 남겨 놓지 않음이 유감이다.


건물도 변하고 사람도 바뀌고...그렇게  황간의 풍경도 나날이 조금씩 바뀐다.

다시 칠월의 볕을 등때기에 오롯 받아내며 천천히 걸어 오는 길. 매번 오토바이를 타고 바쁘게 오가는 길이지만, 그 날 만큼은 조용하기도 하거니와 온갖 감회가 내 안에서 소용돌이 친 날이기도 하다. 이십대 후반에서 오십대 중반으로 치닫는 동안 내 모든 것을 깔아 놓은 저 길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