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나 시집와서 5

황금횃대 2005. 4. 30. 13:12

밥상 차리는 여자

 

 

 

 

 

 

 시집이란걸 와서 보니 시집의 형편이 이랬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고 약혼을 한 상태에서 가까운 곳에 살림이 난 시동생.

벌써 돌 지난 딸 연지가 있었다.

그리고 이 집의 장남 큰 아즈버님이 같이 살았다.

아즈버님은 생업으로 개인택시를 하였는데 택시 면허를 발급 받고 5년 이후에나 타지에서의 영업이 가능했다. 그 때 이미 큰형님은 친정 시누남편이 하던 낚시대 하청 공장을 하나 인수해서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공장을 한답시고 형님 내외는 따로 살았는데, 아즈버님이 왔다갔다 하면서 공장 일도 봐주고 여기로 내려와서는 개인택시 영업을 하였다.

 

 결혼을 하지 않는 막내동서도 집은 따로 있었지만 잔치 뒷끝이라 매일 집에 들어왔고, 내 살림이 서투니 거둘어 줄 요량으로 조카 연지를 데리고 매일 집으로 왔다. 그러니까 형님인 나의 결혼식 뒤치닥거리를 동서가 다 한 셈이다. 그러니 집에는 여덟식구가 하루종일 밥을 먹었다.

 

  아버님, 아즈버님, 남편, 시동생이 모두 영업용 택시를 하였다. 개인택시와 회사택시 한 대를 시동생과 고스방이 주야 교대를 하면서 일을 했다. 그러니 식사시간이 각각 달랐다. 일하다가 틈을 봐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러 오는 것이다.

 

 아침부터 밥상을 차리기 시작하면 어떤 날은 하루종일 열번 혹은 열댓번의 밥상을 차렸다.

부엌은 재래식이라 움품 꺼졌지, 냉장고는 마루에 있지 부엌에서 둥근상에 부엌에서 데운 반찬을 떠서 상 위에 놓고는, 한 칸 더 높은 부엌으로 들어 올려 상을 부뚜막에 놓고, 신발을 벗고 부뚜막 위에 올라와 문턱을 다시 지나고 부엌과 마루 사이의 문을 열어 상을 들어다 놓고 마루에 앉아 보온밥통 속의 밥을 푸고, 또 냉장고에 보관 중인 반찬을 꺼내서 상을 차리고..그렇게 해야 한 번의 밥상이 차려졌다. 어떨 땐 방금 냉장고에 반찬을 넣고 상을 치우고 행주로 밥상을 닦는데 차 들어오는 소리가 나서 또 상을 차릴 때도 있었다.

 

 츠자적에야 밥상 차리는 일이 자주 있었나? 이건 그야말로 돌아서면 밥상 차리고 돌아서면 밥상 치우는게 하루 종일의 일이였다. 기껏 올려 놓은 반찬을 어머님은 "이건 두었다가 상에 놓으라"는 말씀으로 밥상에서 내려 놓으셨다. 그러니까 나하고 어머님이 먹는 밥상은 상이 아닌 것이다. 아버님, 남편, 이렇게 두 사람만이 온전한 밥상을 받을 수 있는게다. 어머님이 드시지 않고 내려 놓는 반찬을 내가 먹겠다고 다시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결혼 전에 친정엄마는 밥상의 반찬에 대해 차별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살다가 어머님의 관습을 따르자니 속에서 울화통이 터졌다.

 

 신혼 초, 새댁 시절에야 언감생심 올리지도 못한 말을 아이 둘 낳고 슬슬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자 어머님께 반박도 하게 되었으니.

 

"어머님, 이 반찬 상에 올리라면 우리 먹는 상은 밥상도 아닌거라요?"

 

간뎅이를 난닝구 바깥에 끄집어 내놓고 이런 말을 하면 어머님은 뜨아하게 쳐다보셨지만, 내일 산수갑산을 갈지라도 못땠게 한 마디 하고 나면 가슴 속에 체증이 내려가듯 후련했다.

 

 그렇게 차려 들이는 밥상을 고스방은 가끔씩 때기나발쳤다.

제 성질을 못이겨 그런거라고 두어번은 받아 주었는데 그 담부터는 이 무슨 빌어먹을 짓인가 싶어서 나도 한 몫 거들었다. 때기나발 친 밥상에다 나는 더 큰 살림살이를 갖다 엎어삐릿다.

그러고는 밥상 쓸어 버리는 버릇을 고쳤다. 아니아니아니아니 스방놈이 버릇을 고친게 아니라 밥상 머리에서 아예 시비를 걸지 않는 요령을 내가 기특허게도 터득한 것이다.

 

 지금도 밥상이라면 하루에 일곱번 정도 차리는 것이 기본이다.

논일이나 밭일 하고 온 시동생이 집으로 들어오면 한 번 더 상을 봐야하는 건 기정사실이고.

그래도 지금은 들밥 해서 갖다 나르는 일이 드물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놉 얻어 일 하는 날은 하루종일 부엌머리에서 동당걸음을 해야한다. 이백포기 김장하는 날도, 종일 부침개를 구으며 제사음식 장만하는 날도 밥상은 그렇게 차려진다.

 

 우리 아버님 올해 여든넷이신데도 아직 개인택시를 하시고, 고스방 이날 이때껏 보약 한 번 먹지 않아도 저리 건강하게 뺑뺑이 돌며 일 잘 하는것도 알고보면 시어머님 때부터 부지런히 정성껏 차려 준 밥상의 힘이 아니였나 싶다.

나야 뭐 정성의 'ㅈ'도 개뿔이나 안 들어간 밥상을 차려내면서도 생색은 십리 밖에서도 훤히 내다보일만큼 닦아서 내놓는데......

 

 오늘날, 우리는 밥상을 포기하고 산다.

둘러 앉아 뜨거운 밥알을 꼭,꼭 씹어가며 젓가락 자주 가는 음식을 그 사람 앞으로 가져다 놓는 배려도 슬그머니 잃어버리고, 가족의 얼굴을 살피는 일도 점점 드물어간다.

여편네들은 편해서 좋은데...그 대신 잃어가는 것도 있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