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마당 깊은 집 - 가을 풍경
포도가 익으면서 자꾸 터지는 바람에 내 심정도 터져 나가 자빠진다
자빠진 피멍 사이에도 가을은 오는가
늦은 밤 차고에 앉아
포도 작업하다가 폭 한숨을 내어쉬면
오호라 아들놈이 잡아 떼어먹는 솜사탕 닮은 입김이
초파리 무궁무진 날리는 형광등 불빛을 향하여
앳된
머리를 풀어낸다
이백년 묵은 집터에 사는 나는 참말로 부자라.
집이야 십수년 전에 세멘슬라브으로
지었어도
아랫채 흙집에 비 오면 양철지붕 골골이 타고 내리는
기맥힌 낙숫물을 볼 수 있는 똥찌그리한 아랫채가 있어
한 채도
없는 사람에 비하면 두 세채 징기고 살기 일도 없다
마당조차 착착 다져진 황토 마당에 씰은 드키 환하였으면
좋겠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세멘트로 화악 포장을 하였으니
세상일이란게 어디 물,좋고, 정자,좋고 샛서방놈까지 머찐 그런 곳이
있겠느냐
그렇지만 우리집 뒤안은 참말로 기맥히게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천하에 게으른 내가
청소를 자주 하지 않는 까닭에 뒤안
돌아가 보면 요즘 낙엽들이 살판이 났다
마당 가장 자리에 빠꼼한 틈만 있으면 어데든 나무를
심어 놔서
씩잖은 감나무들이 즐비하거니와 거개다 앵두나무에 대추나무,
봄이면 노란 꽃을 피우는 골담초, 원자폭탄 투하 시 버섯구름
모양의 사철나무 하며, 첫봄에 빨간 순을 뿌득뿌듯 밀어 올리는
가죽나무에...일일이 열거하자면 손가락이 아프다
도시의 정원처럼 잘 다듬어지진 않았어도 서로서로 다툼없이
봄이면 새순이 돋아나고, 여름 폭풍에는 살구나무 아래
장꽝에
차례차례 제 그림자를 흔들며 미친 듯 춤도 추어 보는 것이다
그런 뒤안에 요즘 물오른 가을이 한창이다
어데서 날아 온지도 모를 췻덩이(취나물) 백설공주 귓볼같은 뽀얀 꽃을
가쟁이가쟁이마다 매달아 어두컴컴한 나무 아래 단연코
화사한 제 얼굴로 마지막으로 피워 물고,
홍시로 먹어도, 곶감을 만들어도 맛대가리 하나 없는 돌감나무
잎사귀는 어데서 저리
고운 치장을 물고 왔는가
시나브로 뚝, 뚝 가지에서 미련없이 인연을 떨궈내는 모습은
축담에 쪼글시고 앉아 아무리 치어다봐도
지루하지 않다
저사리 핀 대추나무는 비루먹은 망아지 볼기짝 처럼 비비 돌아가는데
역시나 나무 꼬라지가 저러니 달고
있는 몇 안되는 대추자슥들도
비리배리 볼품이 없다. 저걸 서방눔한테 비어 내라 해도 도무지 말을 안 듣는다.
나무 귀신이 있다라나? 쩝...
말 안듣는놈 한테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가을비 한차례 쏟아지면
짜잔한 이파리 장꽝에
처걱처럭 쳐 발라 놓는기 꼴비기 싫어 죽것다
울 시어머님 연세가 올해 여든이신데, 꽃다운 새댁시절
어머님 시어머니와
같이 어데서 캐 온 석류는 이제 육십년이 넘었나
봄날 잘 익은 꽈리색 꽃을 매달았다가, 요즘은 검버섯 잔뜩 핀
석류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저거이 쩌~억 벌어지면 붉은 루비같은
알갱이가 쳐다 볼 적마다 입안에 신물을 한바가지씩 머금게 하고
누구 하나 따는
사람도 없고 먹자고 달겨 드는 사람도 없어
저절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석류가 열고, 그러다간 주책없이 벌었다가
지절로 떨어져
돌삐 옆에서 차분히 생을 지운다
그 많은 낙엽들을 화~악 대빗자루로 쓸어다 불을 지핀다
눅눅한 잎들이 타면서 연기를
내어 뱉지만 지깟 놈들이 벨 수가 있나
화끈 달아오르는 열기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내생을 기약하며
뽀얀 재 한 줌 남기고
없어진다
그러는 사이사이에도 뒷 담장 담쟁이는 혼신의 덩쿨을 뻗어
양지로 손을 내밀어 보지만, 저눔 역시 곧 떨어져
숫채 구멍 어디쯤에
물 묻어 썩어 나자빠질 제 육신의 말로를 해 떨어지기 전에 이해하리라.
아직 두어번 더 쓸고
태우며 대 빗자루에 몸을 기대어 불길을 바라볼
기회가 있겠지만, 가을은 이미 제 옆구리 깊은 곳에서 시린 입김을
더욱 더 퍼올리고
있다
(2002.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