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섯, 그 가을에
더블 침대에 날 빼고 세 식구가 잠을 잔다.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천정 높은 방 안을 소음으로 가득 채운다. 딸 아이의 치마 잠옷은 허리에 감겨 있고, 병조의 두 다리는 남편의 목과 배에 기분좋게 올려져 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아닐까봐 두 팔을 위로 올리고 한잠이 들었다
나는 왠일인지 잠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생각'10월달분을 한꺼번에 다 읽고 오줌 누러 가는 길에 식탁 위에 놓인 수박을 세쪽 먹기까지 하였다. 날씨가 차가와 오늘 같은 날 달밤에(ㅎㅎ그믐이다) 나가보면 칠흑같은 어둠에 찬 별빛이 쏟아지겠지. 싸늘한 밤공기 속에 맨발로 슬리퍼 신고 찬 별을 바라보는 기분 어떻겠니? "따봉이지 뭐." 서글프고, 힘 들고, 가슴이 답답하고...온갖 안좋은 상황 중에서도 내가 내 자신을 추스릴 수 있었던 가장 가까운 이유는 <편지를 쓸수 있다는 것>일거다.
항상 네가 하는 말중 "네가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맙다"하였지만 오늘 나야말로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바라 이 말이다.
"Rufina가 늘 그 자리에서 별반 주소 변경없이 내 편지를 받아줌에 참 고맙다"고.
늦가을의 몸부림.
하루 종일 은사시나무가 바람에 휩쓸리고 감잎사구들이 이 모퉁이 저 모퉁이로 몰려 다닌다.
저녁에 아이들과 같이 누워서 히히호호 장난치는게 너무 재미있다. 기실 이렇게 늘 사는 것 같아도 실제 아이들과 장난치며 이불에서 딩굴고 빠떼루 놀이 하며 노는 날이 몇날 안된다.
아이들은 쉬자라고, 내가 아무리 장난을 걸어도 그네들이 응답치 않을 때가 오리라. 그 때 나는 혼자 침대에 누워 지금 시간을 목 울대가 아프도록 그리워하겠지.
어제 들깨 타작을 하였다
얼기미에 타작한 들깨를 높이 들고 슬슬 흔들면 잘 여문 들깨는 밑으로 떨어지고 쭉정이, 껍데기들은 바람에 날려간다.
한가마니 반쯤 되는 타작을 그렇게 쳐내리면서 <말씀>을 생각한다.
-악인의 신세는 바람에 날리우는 겨와 같나니-
인생이 쭉데기만 남으면 들깨껍데기, 바람에 날리우는 겨와 같겠지. 이제 잠 온다.
1998. 10. 19 상순이가.
<간송 미술관 앞 소스 187 식당 입구의 부레옥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