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봉지를 싸다.
1.
<포도봉지를 쌌다>로 처음 시작하는 문장과
<포도봉지를 싸는 일>로 처음 시작하는 문장과는 글 내용이 엄청나게 다를 것이다.
어떻게 다르냐고?
지금부터 함 써보자.
2.
<포도봉지를 쌌다>
돈내기 놉을 넷을 얻어 새벽 다섯시부터 작업을 한다
장마가 시작 되어 비는 미친년이 깔리는 오줌발처럼 중구난방이다
시누이 동네에서 전문가들이 왔다.
기형도가 말하는 전문가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도 충분히 무섭다
닳고 거친 손톱 밑에 검게 물든 풋물이 전문가의 무늬를 말해 준다.
포도봉지를 한 번에 찝어 낼수 있는 물통을 옆구리에 차고
어떤 빗방울에도 이겨낼 비옷을 입는다
비옷과 살 사이에도 테이프를 붙여
내면을 적실 어떤 습기도 침범치 못하게 한다
내면이 젖는 다는 건, 비애의 곰팡이가 돋게 하는 원인임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안다.
포도가지가 할퀴어도 절대 벗길 수 없는 러플이 달린 차양모자와
작년에도 분명 보았던 그 회색 고무코팅 장갑을 장착했다.
하루종일 각각의 놉들은 오천여장의 봉지를 싼다
보통의 사람이 쌀 수 있는 하루의 양은 이천장 남짓
가히 무섭지 않느뇨
그러면서도 그들은 종일 포도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영미엄마 이틀을 연달아 서방 육봉침을 맞아
아침나절 흔드는 궁뎅이의 움직임이 틀리지 않느냐는 둥
혹은
오늘에서야 허리 아랫녁 고추장 단지가 깨져
일하기가 거북시럽다는 얘기에
영춘당 영감 여든에 새장개 간 이야기며
그 영감 요새 젊은 예펜네 한테 얼마나 봉사 했으면
얼골에 병색이 완연하다는 걱정까지
빗방울이 트레몰로로 내리면 그 빠르기에 맞춰
오천장의 봉지를 싸며 서말 닷되, 그러니까 너말 쯤의 수다를
끊임없이 털어내고 있다.
전문가!
무섭지 않느뇨?
3.
<포도봉지를 싸는 일>
천여평 포도밭에 한약방이 새로 생겼다
신장개업!
개망초화환이 둘러쳐지고 산딸기가 붉은 웃음을 지었다.
나래비를 선 포도순 푸른 골골에 곡신(谷神)의 전설이 달렸다
꽃 피고 열매 맺고 익어서 떨어지는 순리가
봉지에 에워싸여 둥글게 익어간다.
...에잉 생각이 안 나. 역시..역부족 ㅡ.ㅡ;;
4.
봄부터 도모한 일이 오늘 봉지 싸는 일로 결말이 났다
밭은 순식간에 하얀 약봉지를 천장에 매단 옛날 한약방 같다
요새도 천장에 약봉다리 매달아 놓은 한약방이 있을라나?
이렇게 한 가지 일을 매조지고 나면
밤바다에 퍼질고 앉아 술 한 잔 했으면 좋겠다
저어기 파도로 밀려오는 내 구좌에 속으로 오래 외워왔던 건배 문구를 외치며
한 잔 했으면 좋겠다.
당신이 옆에 있으면 더 좋구
그러나 각오는 해야지
내가 술주정이 좀 쎄거등.
5.
술주정하면 또 생각나는 일이 있지.
그치만, 그것은 비밀로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