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참깨를 털며

황금횃대 2005. 8. 16. 19:44

참깨를 털며

 

 

이태준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갱이들

도시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없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질금질금 비가 지리는데 시동생은 참깨를 쪄왔다

웃대가리가 새파란게 아직은 덜 여문 것을 씨러지느바람에 급해 쪘단다

추려서 작은단으로 묶고, 그것을 네 개 같이 묶어서 다리발처럼 벌려 세운다

볕이 그 후론 며칠 더 좋아서 참깨는 벌었다.

다 저녁 해그름녘에 시어머님이 참깨를 털잖다.

멍석을 깔고 묶어 놓은 참깻단을 옮기니 좌르르르 포장에 참깨가 쏟아진다.

지팽이로 탁탁 터는데 시처럼,

엄니는 달개듯 살살 터는데

땀을 투닥투닥 흘리며 못내 볼멘 얼굴인 나는 지팽이로 죽어라 후드러팬다

참깨는 멍석마당을 벗어나면서까지 놀라자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