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부림
몇년 전, 울 애들이 초등학교 댕길 때 자모회장을 이년에 걸쳐 맡은 적이 있었다.
첫 해, 학기 초에 자모회를 하러 가는데 고스방이 딱 그러는거다
"학교 가서 임원같은 거 맡아오지 말엇!"
근데 어디 그게 되냔말이다.
아지매들이 한 번 임원을 하면 촌에는 도시하고 달라서 아주 디뻐꺼지는지 당체 임원을
잘 안 맡으려한다. 그래서 자연 임원이나 회장은 중간 학년 엄마에게 내려오기 일쑤인데
내가 자모회 회의를 하면 주로 급식에 대해 자주 따져대고 아새끼들 밥 좀 많이 퍼주라고
울 딸래미 좀 우량안데 맨날 밥이 작아서 집에 와서 몇 그럭을 퍼묵고 앉았다고 제발 밥 좀
많이 주라고 가뜩이나 큰 목소리를 고래고래 급식소 회의장이 찌렁찌렁 울리도록 발언을 하고 했등만, 촌 아지매들이 내가 뭔 대단한 목청이라도 가진 줄 알고 자모회장 선출에
후보를 올려 놓고는 덜컥 당선을 시킨것이다.
사람이 왜 좀 모질라면 몇 사람 후보 중에 일등으로 당선 됐다는 것만으로도 고만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우쭐해져서, 아침에 스방놈이 신신당부 한 것을 깜빡하게 된다.
회장, 그 까이꺼 대애충 몇 발자욱 아지매들 보다 앞서서 일 하믄 되겠지 싶어 수락을 하고
뽀사지게는 일을 못해도 열심히는 하겠다고 인사를 하고 집에 와서 고스방한테 이야기하니
고만 눙깔이 화악 돌아간다.
고스방의 생각인 즉슨, 이 좁아터진 말 많은 동네에 소득도 없는 일거릴 맡아서 하다보면
여편네들 구설에 올라 안 좋은 소리 듣기 일쑤인데 뭣하러 뜨신 밥먹고 그런 되잖은 말을 들을
것인가...하는 노파심 때문에 그런것인데, 속 좁아터진 나는 여편네 가둬놓고 살라능가? 하면서
서방에게 곱지않는 눈길을 삐죽빼죽 째려됐던 것이다.
학교 일이란게 안 하자면 별거 없지만, 하자면 사사건건 참석을 해야하기 때문에 집구석에서
나갈 일이 자연 많아졌다. 시부모님 진지 차려드리는 것도 걸리고..이참 저참 곱지 않는 눈길로
나를 감시하고 꼬투리 잡을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랍쇼 여편네가 그것도 모르고 덜컥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으니.
집구석일은 하라면 피곤하네 어쩌네하며 차일피일 미루고 안하더만, 학교 일은 뭐 찰떡 꿀 발라놨나 그건 어찌 그리 미루지 않고 잘하노...이런 말이 나오면서 싸움이 붙었다.
부부 싸움이란게 한 사람이 피하면 자연 수그러들게 마련인데 그 때 나는 동네 씨름선수에다 팔팔한 기운이 뻗친 삼십대란 말이지.
벌써 몇년 묵은 레파토리 싸움 문장을 써가며 뭐라 대거리를 했더니 고스방 헐크로 변한다.
그 때 아이들도 집에 있었는데 마루에 과일 깎아 묵던 과도를 집어 들고 위협을 하는 것이다
승질 나면 물불 안 가리는 위인이라는 걸 내 진작 알았지만, 아이들이 있는데 과도를 쳐드는 액션은 너무 오바였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것이 어떤 파급을 가져 올지 전혀 몰랐으리라.
나는 좀 겁도 나고 해서 목소리를 좀 낮추고 눈치를 보니 <죽이라, 죽이라, 니죽고 내 죽자!> 하고 대가리 디다밀 상황이 아닌것 같아 속으로 이 상황을 어찌할까...하고 있는데 마침 어머님이 나서 주었다
"아이고 에비야 참아라...이 무슨 일이야. 참어..참어..."엄니가 아주 매달리며 사정을 하니 들었던 칼 무라도 벤다고 방바닥을 향해 휙 집어 던졌는데 어이구 그게 방바닥 콘크리트에 45도 각도로 파악 꽂혀버린 것이다.
칼도 집어덴졌겠다 어머님이 매달리니 고스방도 그제서야 분을 삭이며 주저앉아 담배 한 대(금연 전) 빼물고 분위기 수습에 들어갔다. 아이 둘은 놀란 토끼눈을 해서 구석에 몰려 앉아 있고 나도 정신을 차려 아이들 델고 방에 들어가 그냥 말없이 앉아 있으니 눈물이 펑펑 솟는거라...어이구 그 아수라장을 어찌 말로 다 끄집어내 놓는단 말인가
한참 뒤에 고스방은 일하러 가고 저녁이 됐는데 마루 바닥에 물이 흥건하다
가만히 들여다 보니 아까 칼 꽂힌 자국에서 물이 솟아 나는 것이다. 바로 책장 앞이라 물은 책장 아래로 스며 걸레로 닦아도 닦아서 베여나온다.
사람이 무심코 한 행동에도 살(殺)이 끼이면 가벼운 건드림에도 생명이 왔다갔다 한다더니, 고스방이 집어던진 칼이 하필이면 방바닥 밑에 보일러 엑셀 파이프를 찔렀던 것이다. 일부러 찾을래도 그 파이프가 어디로 돌아 어디로 나가는지 모를판에 그렇게 던진 칼이 아주 정확하게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파이프에 꽂힌 것이다.
자...저걸 어떻게 하나.
저녁 밥 먹으러 들어올 때까지 걸레로 물만 훔쳐내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고스방 들어와서 보더니 이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본다
낮에 죽이네 살리네 싸우던 상황은 안개가 걷히듯 어디로 가고 단지 방바닥에 솟아나는 저 샘물같은 보일러 온수가 잇슈가 되었다
얼굴에 걱정이 태산이다. 마치 실컷 재재부리를 하고는 들어가 엄마 한테 혼날게 두려운 어린아이같이.
어떻게 하나 두고 본다며 암말도 않고 물만 닦에 세수대야에 걸레를 연신 짤아대고 있으니 뭐라 한다.
"이거 마루 바닥을 다 뜯고 파이프를 새로 놓아야하나...."(난감천만이다 ㅎㅎㅎ)
두고보자니 자신도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그런걸 어쩌누...저누무 스방하고 안 살고 보일러에 불 안 때면 복수하는 셈치고 내비두겠지만 당장 내 책이 들어있는 책장이 물에 젖어 썩을판이다.
실쩌기 처방전을 제시한다
"그라지 말고 물 새는 부분에 망치로 조금 뚜두리깨서 새는 부분 만큼 잘라내고 보일러집에가서 엑셀파이프랑 이움나사(그걸 머라하는지 모르겠네) 두 개 사와 양쪽으로 이어야재..."
차 타고 나가더니 득달같이 사왔다. 보일러 수리하는 사람 부르면 기십만원 날아갈것인데 그렇게 해서 테프론 테잎 감아서 겨우 응급조치를 하니 물이 조금씩 새나와도 아까보다는 덜하다.
장판을 네모지게 오려내고 그 밑에 바닥을 사방 이십여센치 뜯어 냈으니 오매가매 안 볼래도 안 볼 수가 없다. 내가 그걸 삼년동안 방바닥 떼우지 않고 그냥 나뒀다. 보고 반성 좀 하라고.
그래봤자 반성하고 승질 죽일 스방도 아니지만....그렇게 불같고 벌에 쏘인 황소같은 서방도 나이앞에는 못당하고 요새는 많이 승질이 죽었다. 아니아니아니아니 그 승질 어디갈까마는 내가 스방 이겨 먹을라고 뎀비지를 않는다. 고스방 말마따나 꼬추 달린 놈이 그 성질도 없으면 우예 살아가노 하지만, 사람은 다 똑같은데 저만 승질이 있고 나는 뭐 무조건 수그리만 하란 말가.
그래살던 저래살던...벌써 열일곱해를 살았네..
그러나 오래오래 내 가슴에 그 광란의 칼부림은 남아있어 지금도 문득 뗌질한 마루바닥 어디쯤을 가늠하며 가심패기 서늘하게 쳐다보기도 한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