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횃대 2005. 10. 6. 20:22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날

농사꾼 아우가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7마지기 앞논에 벼를 털었다.

얼마전 태풍 온다기에 남편과 같이 물꼬를 열기 위해 같이 가다가 누릇누릇해지는 벼를 보며 내가 <절시>라고 한 마디 하다

쪼뱅이 여편네가 이제 <절시>라는 말을 아는 것 보아 농사꾼이 좀 되가는갑다 한다.

내가 절시만 알꺼나? 하루는 또 전화가 왔는데 상대방이 술이 한 잔된 목소리로 묻는다

"거기 물꼬 아니라요?"

"물꼬 아니고 수멍아구진데요"

그 소릴 시동생이 옆에서 듣고 깜박 자물시게 웃는다

농사꾼은 달리 농사꾼이 아니다.

자유무역협정이니 농정이 어떻니 저떻니 그런거 잘 모른다. 그냥 농사 이런 이야기 나오면 입이 근질근질하여 뭐라 한 마디 거들고 싶으면 농사꾼이다.

길 가다가 호박넝쿨이 길 안쪽으로 들어오면 그거 거둬서 차 바퀴에 안 깔리도록 덤불쪽으로 밀어 넣어 주고, 넘으 전구지 밭 앞에 쪼그리고 앉으면 손이 가만 놀지 않고 사이에 난 풀이라도 쥐뜯으면 농사꾼이다.

 

아침 일찍 타작을 하면 이슬 때문에 나락이 젖어 말리는 시간이 오래걸린다

씩잖은 빗방울이 요즘은 자주 뿌려 뭣이라도 다글랑다글랑 소리나게 말려 갈무리 해야하는 사람들 심정에 부애를 지른다. 어찌된 셈인지 올해는 멸구가 극성을 부려서, 그것들이 와~ 날아와 벼에 앉으면 고만 메뚜기 떼가 지나간듯 쑥대밭이 된다. 멸구는 예방도 안되고 난감한 해충이다.

 

멸구가 극성이라 벼가 어지가이 여물었다 생각되어 시간을 다투어 타작을 했다. 더러 포르리한 나락이 눈에 띄지만 회관 배꾸마당에 타작한 나락을 멍석 위에 깔아 놓으니 장관이다.

고무장화를 신고 골을 지으며 하루를 볕과 같이 산다.

해시계처럼 꼿꼿하게 서서 뒷짐을 지고 가만가만 나락에게 골을 지어준다. 그걸 보더니 고서방이 철물점에 가서 골을 가늘게 만드는 도구를 하나 사가지고 왔다. 곱게 곱게 골을 타준다. 그걸 끌고 다니면서 종일 볕에다 나도 말리고 나락도 말린다.

 

 

 

가지런히 나락들이 물결무늬처럼 줄지어 마르는 풍경은 지나가는 사람 누구나 입을 대는 풍경이다. 안 먹고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르다느니. 이걸 매상을 하느냐고 물어 보는 이...이런저런 대답을 하다보면 눈치 빠른 사람은 금방 우리집 형편을 알게 된다.

 

매상은 하나도 안하고, 작은집, 형제간 사돈집에 딸네들 두루두루 한 가마니씩 갖다 엥기고 여섯 식구 먹으면 어지간히 저 나락을 다 찧어 먹는다는 걸.

베꾸마당 한 귀퉁이 등나무 그늘 아래 앉아 <도모유키>를 읽으며 나락을 저어준다

책속에 백성들은 조선인이나 왜구나 너나없이 주린배를 움켜쥐고 살벌한 전쟁을 벌리고 있는데 지금 나는 그 현장을 글로서 상상하며 널린 알곡을 바라본다. 그 시절에 비해 지금은 얼마나 좋은 시절이냐. 그런데도 다들 못 살고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볕은 베꾸마당 옆, 회관의 지붕을 돌아 그림자를 길게 만들며 서쪽으로 하늘길을 밟아간다.

문득 문득 시간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의 그림자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

오후 세시쯤 되면 그림자는 이렇게 무늬를 만들어 내는구나...다섯시는...

 

 

 

나락 멍석 밖, 놀고 있는 햇살이 아까와 빗자루도 볕에 내어 놓고, 회관의 담요도 걸어 놓고, 그렇게 혼자서 꽁닥벌거지처럼 사부작사부작 해와 같이 놀았다

나락은 바스락바스락, 한 줌 볕에도 가벼운 소리를 내며 말라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