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운자씨
스방하고 사는 일은 살아갈 수록 새록새록 새 맛이다.
그 맛이란게 뭐 생전 처음 보는 맛이 아니고 얼래? 이런 맛이 있었나? 하고 놀라는 맛이니.
해마다 새해가 되면 정월달 달력 앞에다 제사며 행사를 깨알같이 적어 놓는데
올해는 정신을 어디다 두었는지 결혼기념일이라는 메모가 사라졌다
아주 까먹었다. 그러다 스무하룻날 앗차 내일이...하고 깜짝 놀라 기억을 했으니
그런데도 고스방은 그렇지 않다.
자기 생일은 양력으로 환산하여 며칠인지 몰라도 결혼 기념일 만은 아주 잘 기억한다
아침에 일어나 이야기 하면서
"여보, 오늘은 당신과 내가 한 날 한 시에 어른이 된 날이네?"했더니
"됐어 여편네야."이런다.
낮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와 아이들 교육비며 기타 경비를 계산하려던 고스방
자기 생각보다 금액이 많아지자 나한테 돈을 다 넘겨 주면서 에잉..한다
왜요?
나는 돈이 좀 남으면 직지사나 둘이 오붓하게 갈려구 했더니만 그것도 안 되겠네.
<직지사가 무슨 의미인지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시리라>
좋다 말았다. 졸지에 또 직지사가 날아갔다.
아이들 점심값이며 방학 수업료 계산하고 이만원쯤 남으니까
"고만 그걸로 짜장면이나 시켜먹고 말지"
그러고 마는 줄 알았다
요새 시골 푸줏간에는 설대목 본다고 다들 소를 잡는다
내 단골 푸줏간도 예외는 아니라서 그제 저녁에 소를 잡아 선지를 사 가지고 왔다
선지국 끓이는 솥은 다 쳐댔기에 그걸 닦아야 했다
닦는다 닦는다 하면서 며칠이 지났으니..
동네 입구에서 연탄재를 한 덩어리 주워와 솥을 닦는다
쇠수세미가 가랑가랑 소리를 내며 냄비살을 깎아 먹으며 하얗게 닦인다
될까? 하고 반신반의하며 닦았는데, 역쉬 솥 태운 것은 연탄재가 최고다
땀을 쩔쩔 흘리며 용을 쓰고는 깨끗하게 헹궈서 선지국을 끓인다.
선지국 끓이는데는 이제 도가 텄다.
큰 솥에 물을 펄펄 끓여 시뻘건 선지를 삶아내고
내장을 작게 썰어 뜨거운 물에 데쳐 내어서
무 구뎅이에서 저장 무 몇개 파다가 척,척 삐져 넣고
매푸한 고춧가루 한 국자 풀어서 왕소금 한 오큼 집어 넣고 들들 볶다가 물잡아 끓이면 된다
끓으면 야채를 넣고 마늘 듬뿍 두드려 넣고 끓이다가 선지를 칼로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으면
시원하고 칼칼한 선지국 끝이다
저녁에 선지국에 밥 말아서 한 그릇 먹고 반그릇을 더 먹은 고스방
어머님도 국만 두 그릇 드시면서 언제부터 좀 생각이 있었는데...하시며 땀을 흘리며 잘 드신다
그걸로 어머님하고 나하고 껄끄러운 감정들은 싸악 씻겨내려갔다
저녁 먹고 고스방...김천 갈려면 가던지..하고 이야기하니 아이들이 와아~ 하고 준비를 한다
마트에 가서 잠깐 동안 카트 끌고 다니면서 명절 장도 대충 보는데 고스방이 아이들에게 꽃다발을 만들어 오라면서 돈을 준다. 아이들이 마트 꽃집으로 가서 장미 일곱송이와 안개꽃을 섞어서 꽃다발을 만들어 왔다.
"빨간 장미야? 아까 내가 볼 때는 분홍 장미가 더 이뿌던데.."
고스방은 주차 시키고 내려오는 길에 꽃집에 들렀다 왔나보다
직접 그런 걸 사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그래서 꽃만 보고 내려와서는 아이들에게 꽃다발을 만들어 오라고 시켰나보다
이쁜 꽃다발이 내 손으로 건너왔다
비록 고스방의 목소리로 "사랑해"하면서 건네 온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 만은 사랑해 열 제곱도 더 되리라(착각? 푸히...)
장을 보고는 아이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왕의 남자>를 보러갔다
너도 보고 나도 보고 우리 모두 본 영화 얘기는 그만 두고
돌아오는 길 아이들이 케이크를 샀다.
차 안에서 빵에다 불을 켜고 아이들의 축하 노래를 듣는다
엄마 입이 귀에 걸렸어
아이들이 놀려 대고 있다
그려...그렇게 놀려도 행복하네.
은밀한 운자씨의 직지사 계획은 무산 되었지만, 차를 타고 가면서 아이들과 얘기하고, 같이 영화를 보고, 편의점 앞에서 차를 세워 로또 용지에다 자신들에게 떠오른 영감의 숫자와 17, 21. 22 와 같은 오늘 무슨 날에 관련된 숫자들을 검은 색으로 정성스럽게 칠하면서 하루가 넘어가는 걸 온 식구가 같이 한다. 나 같은 무수리는 이런 이벤트 십 칠년만에 한 번만 해조도 감지덕지 황감하여 맨날 힘 내고 산다. 저 별빛 같은 따스한 시간들을 오래오래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