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손편지 엿보기

황금횃대 2004. 4. 12. 19:03
1.

얼굴에 오이와 밀가루 섞은 것을 개어 바르고 깜박 한 숨 잤나봐요
텔레비전에서는 늦은밤 루어낚시 원정대가 쉴새없이 릴을 감고 있는
그 소리 사이로 정말 깜박 잠이 들었더랬습니다
문득 부르는 소리에 깨어서 보니 밤 12시가 넘었는데 왠 아주머니께서
현관문을 두드리며 '택시'가 운행되느냐고 묻습니다.
잠결에 얼굴에 허연휴지를 덕지덕지 덮고 있다가 화들짝 깨어서 전화를
겁니다. 마침 집으로 들어오는 중이라며 고서방이 졸리는 목소리를 전화를 받아요. 대문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아줌마의 초조한 목소리를 싣고
고서방은 영동역으로 달려갔나봅니다

밀가루반죽을 떼냅니다. 어데 가계부 생활안내에 보니까 오이 갈아서 밀가루 넣어 개서 바르면 피부진정효과가 있다나? 가마이 생각하면 요새 피부가 발악을 한 일도 없는데 뭔 피부를 진성시킨다고 늦은 밤 석고마스크처럼 허옇게 밀가루를 바르고 흘러내리지 않게 휴지를 붙여놓았는지 몰라요
허기사, 심심하다는 이유 한 가지는 내 놓을 수가 있겠네요.

편지는 며칠 전에 받아 놓고 일찌감치 답장을 못썼습니다
아모 불편할 것도 없는데 나는 필기도구 걱정을 하고, 편지지 걱정을 하며 쉽게 책상 앞에 좌정하지 못했지요. 그러다 딱 오늘 밤, 되었습니다.
시간도 적당하고, 배깔고 누운 방바닥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옛 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CROSS' 볼펜이 내 손에 쥐어져있어 편지쓰기 참 적당합니다.



2.

"XX님, 좋은 글 많이 쓰세요. 나는 끝까정 XX님 글 사랑할테요"
이렇게 그가 말하며 전해 준 볼펜입니다
꼭 몸통이 통통한 물고기의 등지느러미 쪽 유선을 닮았어요. 노란색, 아주 샛노랗지도 않고, 그렇다고 미지근한 노란색은 더더욱 아니야요. 맘에 쏙 드는 노란색!
볼펜을 건네주던 손길은 여차저차 시야에서 멀어졌지만 글 많이 쓰라는 당부의 울림은 가끔 심정을 흔듭니다
그래서 혹간 우울해질 때가 있지만, 어데 사람이 서로의 바람들을 다 이루고 살 수가 있나요
푸른 하늘에 그러한 바람이 공수표로만 훨훨 삐라처럼 날립니다.

옛날 비행기가 높디 높은 하늘을 지나가고 나면, 그 아슴한 허공에 반짝반짝 깃털처럼 떨어지던 것. 삐라.
그 말이 주는 어감의 세뇌적 이데올로기만 제거하면 나는 <삐라>라는 낱말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보면>, 아니다, <발견하면> 경찰서나 가까운 군 부대에 신고하라는 경고가 늘 삐라라는 단어 뒤에 꼬리글로 달라붙어 있지만, 공중에서 은총처럼 내리던 반짝반짝 하던 그 무엇.
내 살어가는 어느 부분이 가끔씩 반짝반짝 해 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덧붙여져 <삐라>라는 단어를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이렇게 후덥지근한 여름의 한 날에 누가 공중에서 그런 이벤트 하지 않나..하고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지만, 세상에 그런 일이 사라진지는 참 오래되었다 합니다


3.

요즘은 시누이 형님댁에 가서 포도 작업을 하고 있어요
포도 육손을 따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포도가 익어 너나없이 포도밭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고 형님이 이야기 하면서, 세월 한 번 육실허게 빠르다 하십니다.
그렇지요. 세월의 속도를 누가 따라 잡을까. 늙은 것이 아까와 죽겠다구 한 문장 더 덧붙이십니다. 나는 늙는게 별루 안타깝지 않는데 참 별종이지요?
매일매일을 200%로 살아내는데 뭐가 그리 아쉬울까...이렇게 말하면
이 여편네 또 뻥까고 있네 하시겠지요.
그려..맞어, 그럼 이렇게 말해야지
매일매일 200%의 뻥을 치는데 아쉬울게 뭐가 있노? 하고 그렇게 말하고 나니 마음도 편하고 고개가 끄덕거려집니다.


비 좀 그만 왔으면 좋겠는데, 새벽부터 기어이 빗방울 듯는 소리가 듣깁니다. 양철 지붕에 따당따당 떨어지는 빗소리는 좋지만 농사 생각하면 하냥 좋아할 수도 없어요. 예전 좋아하는 것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의해 좋아하는 목록에서 빠져 나갑니다. 눈 오는 것도 그중 하나지요.
온 식구들이 운전해서 밥 먹고 있으니 자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서방의 눈에는 아직도 내가 아홉살짜리로 보이니 내 생각에는 생활의 성숙도를 높이기 위해 이것저것 많이 포기하고 산다했지만, 맞은편 사람의 기대치에는 어림도 없는 모양입니다.

예전에는 몇장씩 편지 잘 썼더랬는데 그 어른의 조언처럼, 나이가 들어가면 생이든 문장이든 함축이 되어간다고. 그래서 일기도 그날 하루분 쓰는데 두서너줄이면 끝이라고.

헤헤 맞는말 같기도 하고요.
허기사 자꾸 서봤자 그말이 그말잉께.

고만 접습니다 안녕 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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