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호씨네 비릉빡
오늘 4일,9일장인 영동장이랬어요
정월 대보름이 12일이니까 보름 전 마지막 장이래요
보나마다 설날 음식은 어지가히 다 떨어졌을게고, 그 동안 눈 오고 날이 추워 꼼짝도 않하고 있던 골짝골짝 사람들이 보름장도 볼 겸, 뭔가 생경한 풍경도 볼겸 미끄러운 길을 밟아 조심조심 장거릴 나섭니다.
장 풍경 찍어 올라고 가방 속에 디카 넣어가지고 갔슴시롱도 물건 사니라고 정신이 빠져서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었세요. 버스 속에서 자리 잡고 앉으니까 디카생각이 나는기라. 어이구 정신머리 하구는...했어요. 묵나물에 부럼에 온갖것들이 다 나왔등만 그걸 못 보여드리네요.
우리집 대문 들어오는 골목 맞은 편에는 일호씨집 뒤안 담과 현수 할머니 뒤안 담이 같이 붙어서 나란히 저렇게 블록 담장으로 이어져 골목을 만들고 있어요.
가끔 공사장 들락거리는 차들이 두 집 담 우에 얹힌 기왓장을 툭, 툭 건드리고 가는 바람에 현수 할메가 나와서 보고는 "
"이 씨부럴놈들이 뭣땀시 남으 가마이 있는 담장은 건딜어서 기왓장을 다 깨놓는디야"하면서
시끄럽기도 하지만, 현수 할아버지께서 가마이 나오셔서 바로잡아 놓습니다.
희미하지만 비릉빡 윗쪽으로 분필 낙서가 보이시져
요새 아이들은 촌스럽게 비릉빡에 낙서를 하지 않고 삽니다.
옛날에는 비밀스런 카더라 방송의 찌라시 소식들이 비릉빡을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명자 바보 멍충이>는 여사고, 대놓고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돌려서 <장순자 보바>이런 식으로도 적혔지요. 비릉빡 낙서의 압권은 <춘자와 석현이 빠구리 했다>라는 내용이였는데 그런 낙서가 쓰여지면 동네가 시끄럽지요
영동장을 다 보고 버스타고 집에 오는데 물한리 골짝에서 나온 할아버지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이즈음 시간을 어떻게 죽이고 계시는지 이야기 합니다.
"야' 꼴마이 니는 와 장에 나왔노"
"동식이 글마 함 보러왔재. 집이 차 올라 타던 고기서 한참 올라가믄 안 있나"
"좀 어떻터노"
"왼쪽은 영 몬씨겠더라. 덜덜 떠는기"
"에이궁..이젠 존 시절 다 갔는기라. 그게 죽을 때까지 끄난고 가야하는거재."
"니는 요새 우째 지냈노"
"내사 요새 고로쇠 물 받을라꼬 골짝 댕기며 거개 요령소리 나게 안 사나. 눈 오기 전에 파이프설치를 다 해야하는데 고만 눈 오는 바람에 배리놨다. 물 언제 나오냐고 전화는 육실허게 와 쌌는데 얼어 붙어서 나와야말이재"
"다래나무 그거 참 물 많이 나오데"
"그거 물 많이 나오지를. 순데기 끊어 놓으만 한 나절에 땅바닥이 흥건해"
"근데 거 판석이 그 자식 델고 산에 일 갔는데 추위를 어뜨께나 타던지 한참 사람이 안 보이서 찾아 봉께 햇빛 드는 너럭 바위 밑에 낙엽을 똥그랗게 허적거리놓고는 고 안에 떼똥하게 들어앉았어. 그러고는 하는 말이, <행님, 멧돼지놈이 우째 겨울을 나는가 싶디 요렇게 내밍키로 낙엽속에 들앉았는가비라. 세상없이 따뜻허네 히히"
웃음 소리까지 흉내내며 어눌하게 말하는 아저씨의 표정은 앞좌석에 앉은 나조차 안 봐도 비됴다.
"어이, 자네는 눈이 많이 와서 꼼짝도 못했재"
"눈이 우리 동네로 다 몰리 왔는가 세 번이나 마당을 밀어냈는데도 또 그득햐"
"트랙터로 밀었나?"
(하하하하하)
"아이고, 이사람아 눈밀개 그거 있잖아"
"아...그거."
한잔 걸치지도 않는 촌로들의 정겨운 대화들이 실쩌기 사람을 웃긴다.
친구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안부를 대수롭잖게 편히 답하는 사람들의 걱정없고 계산없는 나눔을 본다. 나는...시골 버스 속에서 하냥 아늑하여 큰 소리가 오락가락하여도 잠이 실실 오는 것이다.
꾸벅꾸벅 졸다보니 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