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동맹 상순이

인연이 맺혀지는 자리

황금횃대 2004. 4. 19. 22:30
어제 00시에 사는 언니에게서 소포가 왔다
얌전히 나뭇잎이 눌러진 편지 두 장과 <곽재구의 포구 기행>이란 책이 같이 왔다.
고추를 빻으러 가다가 대문 간 우체통에서 신문과 고지서와 소포를 꺼내서 오토바이 바구니에 싣고는 방앗간에 가서 고추를 빻아 주라고 던져 놓고는 소포부터 끌른다.
책이 나오고, 편지가 나온다.

아름다운 언니의 사연이 나온다. 훗~



쌀이 다 떨어져 아랫채 마루에 얹어 놓은 나락 네가마니 싣고는 방앳간에 찧으러 간다.
전화를 하면 정미소 아저씨가 차를 가지고 온다
시집 와 십수년 나락을 찧으러 가면서 그 아저씨의 차를 타고 다녔지만, 심중에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는 아자씨의 인상에서 세상에는 남자가 있고, 그 남자를 딱 두패로 가르라면, 연애가 가능할까 아니면 동네 슈퍼 아저씨로 남을까..하는 기준이다 으흐흐흐흐


<곽재구의 포구 기행>을 챙겨서 들고 나간다.
나락 찧으러 가면서도 책 들고 나가면 혹자는 내가 억시기도 책 많이 보는 여편네인줄 알고 고개를 끄덕거릴지 모를 일이지만, 기실 책 디럽게 안 읽는다. 아이들한테는 책을 많이 읽어야 나중에 사기를 쳐도 용이하다고 뻥 때리고 살지만, 기실 나는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


나락을 내려 놓고 정미소의 기계 피댓줄은 스위치를 올리자 위~잉 돌아가기 시작한다. 차 안에서 쌀푸대만 발로 밀어 놓고는 책을 읽는다


책 속에 소제목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네-동화와 지세포를 찾아서-"란 곳을 읽었다.
곽재구시인이 시에 마음을 두어 시가 자기에게로 걸어 온 시점에서 헌책방에서 찾아내 흔쾌히 사들였다는 <문학독본>이란 책과 같이 여행을 떠나면서 그 책의 내용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 포구의 풍경과 상념을 적은 글이였는데 일테면 책 속의 저자의 글과 여행을 떠난 것이다.


곽재구 시인은 우리가 들어서 여러가지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이가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할 때(지금도 하는지 모르겠지만) 참 열심히 동인시집이 나오면 사보고 했었다. 오월, 광주...이런 것들이 경상도 어설픈 가스나 한테 무슨 의미인지 지금은 아무 기억도 없다. 나는 기실 그 때 월 팔만오천원 월급을 받으며 자그마한 주물공장에 경리로 일하였으니.


노동이고뭐고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치이는 만원버스에서 한 시간을 서서 출근해서 할아버지 사장님들의 커피를 타 주고 작은 매출전표를 기록하며 자잘구레한 일상과 세무일에 치여서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책도 대구 동인동 헌책방에 자주 들러서 사 봤는데, 그 때 님의 침묵을 손에 넣게 되었다. 1980년 문학세계사라는 출판사에서 출간을 한 것인데, 초판본이다. (지금 다시 확인하니 편집인이 김종해씨다 얼래? 김종해시인인가?)
책의 제목은 <님께서 沈默하지 아니하시면>인데, 시가 세로쓰기로 되어 있고 만해선생님의 산문도 역시 세로쓰기로 쓰여있는데, 글을 읽으면 가로 쓰기가 주는 편안함과는 달리 글의 힘이 세로로 꽂히는 것 같은 느낌도 동시에 온다.


그 책의 237페이지에는 연필로 이런 글이 있다


東海3


東海의 검푸른 파도소리로
兄, 한 여름의 비가 내려요.
날 가둔 모양없는 지붕 위로
허름한 문살 사이로
비린 내음나는 바닷새 울음처럼
검게 내리는 비가


메마른 논둑을 지나
자동차 다니는 신작로까지
어둠을 한치씩 한치씩
세워가요. 내리는 비가
이제는 비가 아니라 설운
가슴 덥혀주는 어둠이어요
하지만 兄, 그 어둠 속에서
설움의 내 피는
흰 빛 옷의 감추어진 설기로
시퍼런 날을 세워 일어서기로
울면서 이야기하네요.


글이 쓰인 한 귀퉁이 여백에 만해의 글이 아닌, 책을 첨으로 사본 이의 글이 적혀 있는 헌 책을 보는 내 심정은 뭐랠까.. 싸아한 보물을 발견한 기쁨이다. 수 백페이지의 글 내용보다 더 한 감동을 내게 준다.
누굴까. 동해의 한 쪽 귀퉁이에서 이 책을 읽으며 형에게 글을 쓴 이가.
뒷 페이지에 글씨의 양각이 다 드러나도록 또박또박 연필로 글을 쓴 이가......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소



<문학독본>이란 책에 쓰여진 시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아오며 그와 함께남쪽 바닷가 길에 별똥 떨어진 곳을 같이 가고 싶어한 곽재구 시인이나, 이 동해란 시를 그가 쓴 팔년 뒤에 읽고 동해의 하조대 푸른 바다를 가슴에 품은 나나 얼추 비슷한 정서로 살아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




이 책을 꺼내 보면, 97년에 책을 읽으며 딸아이에 대한 메모를 남긴 내 글도 끼여 있다.
훗날 내 딸이 엄마의 책을 물려받아, 어느 무료한 휴일 이 책을 들춰 보았을 때 엄마가 쓴 글을 읽게 되면 기분이 어떨까.
메모와 메모가 흐르는 페이지의 풍경을 보며 무얼 느낄까
지금 딸아이는 제 동생과 장난을 치며 고함을 치고 있지만..


시간은 뭘까.
참 마음이 허접해진다.

내가 가진 그 책 마지막 페이지 짙은 밤색의 빈 종이 위에는 이렇게 또 한 편의 양각된 글이 있으니.


님,

盛夏,여름이 더운거야 어디라도 같겠지만

나는 햇빛이라도 안 쪼이니 덜 덥겠지 하고

스스로 자위해본다. 불가의 살생유택을

한 손으로 써 보면서 다른 손으로는

흰 벽과 내 살갗에 붙는 모기들을

사정없이 죽인다. 찰싹 하고 경쾌한

소리가 대답한다




시간도, 사람도, 사건도....다들 인연이구나
'한 번이라도 이 글을 쓴 사람을 만날 수가 있을까'하는 속마음에서 어쩌면 이미 우린 스치듯 만나졌는지도 모를 일.

나락은 윙윙 피댓줄 사이를 지나가고 껍데기 날아간 자리에 뽀얀 쌀이 우수수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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