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부자 냄새와 가난 냄새
황금횃대
2004. 4. 19. 23:07
언제도 말했거니와 나는 맨날 옛날, 옛날 하다가 인생 종칠거 같다
"뎅그렁 뎅그렁....."
초딩학교 사학년 때 나와 M은 일테면 다니던 초등학교 권역권 밖에서 학교를 다녔다.
다들 돌레돌레 학교 주변동네에 살던 학급 구성과는 그 애와 나는 방향은 같아도 동네도 뚝 떨어진 곳에 살았다. 그 아이와 내가 가깝게 된 것은 순전히 그 아이가 소아마비를 앓아 내가 그 애의 가방을 들어다 집까지 데려다 주면서 친하게 지냈다.
입원을 할 때도 있었지만, 대개 다리에 보조기를 끼우고 걸었는데, 보조기 쇠다리와 신발이 달린 그 모양새를 보자면 어린 나이에도 선뜻 손이 가기 어렵게 그것이 주는 느낌은 차갑고 고정화 되어 불편하기 그지없겠구나 하는 생각이였다.
앉아서 보조기에 발을 끼워 넣을 때, 저것이 M의 다리구나 하는 생각보다 저기에 의지해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기맥힌 일일까하는 연민이 앞섰다.
단칸방에 여섯식구가 살던 우리집과는 달리, 그녀의 집은 번듯한 양옥집에 잘 사는 집이였다.
간혹 그 아일 태우러 공장의 차가 오기도 했는데, 어떤 날은 코로나 승용차가 오고, 그 차가 없을 때는 급하게 삼륜 짐차가 오기도 했고, 또 어떤날은 짚차가 오기도 했다. 그나저나 72년도만 해도 그리 차가 흔하지 않는 때여서, 한번씩 차종을 바꿔가며 친구를 태우러 오는 집의 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는 분일까 궁금하였는데, 그 당시 동명목재가 망하기 전이였으니 대구에서 동명목재 대리점을 한다고 했던가 여튼 큰 공장을 한다고 들었다.
범어동 작은 야산 아래 친구의 집이 있었는데, 차가 오지 않는 날은 그 아이의 가방을 들고 학교와 집 사이의 긴 길을 천천히 걸어서 왔다.
여름이면 논둑에서 개구리가 와글와글 울고, 가을이면 메뚜기가 날아올라 그 애를 서 있게 하고 가방 두 개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메뚜기를 잡아
강아지풀 대궁에 끼워 들고는 타박타박 길을 걸었다.
그 애의 집에는 벼라별 장난감이 많았는데, 무엇보다도 내 눈길을 끄는 것은 티비가 있었다는 것.
가방들고 들어가 둘이서 숙제를 하다가 4시가 조금 넘으면 어린이방송을 하였는데, 그 당시 짱구박사라는 어린이인형극을 했었는데, 그게 재미가 있고 신기해서 나는 매번 늦게 집으로 갔다.
집에가면 해가 졌는데도 들어오지 않는다구 엄마한테 얼마나 혼이 났던지.
그렇게 눈물이 쏙 둘러빠지게 혼이 나고도 짱구박사가 내뿜는 인형의 시선에서 나는 그야말로 사로잡힌 영혼이였다.
여름에는 그걸 보고 가도 해가 넘어가기 전이였지만, 겨울에는 다섯시가 넘으면 그만 깜깜하여, 아이 걸음으로 집까지 걸어가면 그야말로 깜깜밤중이 되었다. 하루는 정말 너무 늦어서 쫒겨나기까지 하였으니.
가난한 울 엄마야 어찌 알았겠는가, 딸년이 그 집에 왜 아편처럼 매혹되어 그렇게 매운 눈물을 흘리는 벌을 받으면서도 발걸음을 떼 놓지 못했는가를.
바둑이 뭔지도 모르는 나는 그 집에서 네모진 바둑판과 희고 검은 바둑돌을 처음 보았다. 친구의 오빠는 내게 오목이란 것을 가르쳐 주었고, 그 오락에 흠뻑 빠진 나는 흰 돌과 검은 돌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바둑판에 타악,타악 소릴 내며 놓여질 때의 그 멋진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놀다 보면 일하는 언니를 시켜서 밥상을 차려 주었는데, 그 부드러운 음식의 갖은 구색도 잊을 수가 없다. 하루는 안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그 집 엄마는 참 아름다운 분이셨다. 자그마하니 날씬하고 하얀 얼굴에 한 눈에도 복스럽게 생기신 분이였는데, 번쩍번쩍 하던 자개농의 자개파편이 옆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시게 빛의 휘장을 내렸고, 가계부와 노트 한 권이 가지런히 필기구와 같이 문갑 위에 정갈히 놓여있었다.
그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고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집에는 없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단칸방에서 여섯식구가 복닥대는 우리집 방에는 어느 한 구석 정갈이라는 단어가 앉아 있을 구석이 없었다.
먼지조차도 차분하게 앉아 있을 여유가 없던 곳, 날마다 사내아이 셋과 고집통 딸 하나가 악다구니로 빽빽 고함을 지르고 티격태격 하던 곳.
일테면 그 집에서 이 곳으로 옮겨 온다는 것은 잠시 천국에서 황홀 무아지경에 노닐다가 시궁창으로 돌아 온다는 느낌과 일목 상통하는 것이리라.
가끔 나는 동생도 데리고 그 아이 집으로 갔는데, 일테면 혼자서 감당하는 늦은 귀가 시간의 부담을 동생과 나누면서 공범으로 몰고가는 용의주도함까지 깔았는데, 우리는 그 부자집에서 풍겨오는 아릿한 냄새에 고만 정신이 아득해졌는가 싶다. 그런 저런 공범의식과 성장의 정서적 공감이 지금도 바로 밑의 동생을 쳐다볼 때 문득문득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라 피식 웃음 짓게도 하지만.
그렇게 매일 드나들던 친구집에서 나는 봐서는 아니 될 비밀을 보았으니.
하루는 친구 엄마의 방에 들어 갔는데, 그 친구가 노트를 내리더니 날 보고 읽어 보라는 것이였다.
주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이야기와 잡다한 일상을 기록해 놓으신 일기였는데, 친구가 어떤 한 페이지를 찾더니 읽어 보란다.
무슨 내용인지 세세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귀절은<울었다>는 표현이였다. 세상에, 왕비처럼 아름다운 아줌마의 눈에서 눈물이 나와 울었다는 것. 친구가 말하기를 "울 엄마 일기쓰면서 자주 울어"
순간 나는 눈 앞이 아득해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부잣집에도 눈물이 있는가. 그런 의구심이 들자 나는 그 때부터 짱구박사도 바둑돌 놀이도 심드렁해지고 말았다. 그 뒤로부터는 친구집에 가방을 놓아 두고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우리집은 여전히 서너살 막내동생의 칭얼거림과 우릴 윽박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기차화통 삶아 먹은 크기로 울려 퍼졌는데 그런 것들에 안도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울 엄마는 일기를 쓰면서 홀로 우는 시간은 없었던 것이다.
학년이 바뀌고 그 아이와 내가 반이 갈리면서 내가 부자냄새에 젖을 기회는 영 물 건너 가고 말았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아득하고 까마득하게 내 기운을 배 놓던 시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전상순
"뎅그렁 뎅그렁....."
초딩학교 사학년 때 나와 M은 일테면 다니던 초등학교 권역권 밖에서 학교를 다녔다.
다들 돌레돌레 학교 주변동네에 살던 학급 구성과는 그 애와 나는 방향은 같아도 동네도 뚝 떨어진 곳에 살았다. 그 아이와 내가 가깝게 된 것은 순전히 그 아이가 소아마비를 앓아 내가 그 애의 가방을 들어다 집까지 데려다 주면서 친하게 지냈다.
입원을 할 때도 있었지만, 대개 다리에 보조기를 끼우고 걸었는데, 보조기 쇠다리와 신발이 달린 그 모양새를 보자면 어린 나이에도 선뜻 손이 가기 어렵게 그것이 주는 느낌은 차갑고 고정화 되어 불편하기 그지없겠구나 하는 생각이였다.
앉아서 보조기에 발을 끼워 넣을 때, 저것이 M의 다리구나 하는 생각보다 저기에 의지해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기맥힌 일일까하는 연민이 앞섰다.
단칸방에 여섯식구가 살던 우리집과는 달리, 그녀의 집은 번듯한 양옥집에 잘 사는 집이였다.
간혹 그 아일 태우러 공장의 차가 오기도 했는데, 어떤 날은 코로나 승용차가 오고, 그 차가 없을 때는 급하게 삼륜 짐차가 오기도 했고, 또 어떤날은 짚차가 오기도 했다. 그나저나 72년도만 해도 그리 차가 흔하지 않는 때여서, 한번씩 차종을 바꿔가며 친구를 태우러 오는 집의 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는 분일까 궁금하였는데, 그 당시 동명목재가 망하기 전이였으니 대구에서 동명목재 대리점을 한다고 했던가 여튼 큰 공장을 한다고 들었다.
범어동 작은 야산 아래 친구의 집이 있었는데, 차가 오지 않는 날은 그 아이의 가방을 들고 학교와 집 사이의 긴 길을 천천히 걸어서 왔다.
여름이면 논둑에서 개구리가 와글와글 울고, 가을이면 메뚜기가 날아올라 그 애를 서 있게 하고 가방 두 개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메뚜기를 잡아
강아지풀 대궁에 끼워 들고는 타박타박 길을 걸었다.
그 애의 집에는 벼라별 장난감이 많았는데, 무엇보다도 내 눈길을 끄는 것은 티비가 있었다는 것.
가방들고 들어가 둘이서 숙제를 하다가 4시가 조금 넘으면 어린이방송을 하였는데, 그 당시 짱구박사라는 어린이인형극을 했었는데, 그게 재미가 있고 신기해서 나는 매번 늦게 집으로 갔다.
집에가면 해가 졌는데도 들어오지 않는다구 엄마한테 얼마나 혼이 났던지.
그렇게 눈물이 쏙 둘러빠지게 혼이 나고도 짱구박사가 내뿜는 인형의 시선에서 나는 그야말로 사로잡힌 영혼이였다.
여름에는 그걸 보고 가도 해가 넘어가기 전이였지만, 겨울에는 다섯시가 넘으면 그만 깜깜하여, 아이 걸음으로 집까지 걸어가면 그야말로 깜깜밤중이 되었다. 하루는 정말 너무 늦어서 쫒겨나기까지 하였으니.
가난한 울 엄마야 어찌 알았겠는가, 딸년이 그 집에 왜 아편처럼 매혹되어 그렇게 매운 눈물을 흘리는 벌을 받으면서도 발걸음을 떼 놓지 못했는가를.
바둑이 뭔지도 모르는 나는 그 집에서 네모진 바둑판과 희고 검은 바둑돌을 처음 보았다. 친구의 오빠는 내게 오목이란 것을 가르쳐 주었고, 그 오락에 흠뻑 빠진 나는 흰 돌과 검은 돌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바둑판에 타악,타악 소릴 내며 놓여질 때의 그 멋진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놀다 보면 일하는 언니를 시켜서 밥상을 차려 주었는데, 그 부드러운 음식의 갖은 구색도 잊을 수가 없다. 하루는 안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그 집 엄마는 참 아름다운 분이셨다. 자그마하니 날씬하고 하얀 얼굴에 한 눈에도 복스럽게 생기신 분이였는데, 번쩍번쩍 하던 자개농의 자개파편이 옆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시게 빛의 휘장을 내렸고, 가계부와 노트 한 권이 가지런히 필기구와 같이 문갑 위에 정갈히 놓여있었다.
그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고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집에는 없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단칸방에서 여섯식구가 복닥대는 우리집 방에는 어느 한 구석 정갈이라는 단어가 앉아 있을 구석이 없었다.
먼지조차도 차분하게 앉아 있을 여유가 없던 곳, 날마다 사내아이 셋과 고집통 딸 하나가 악다구니로 빽빽 고함을 지르고 티격태격 하던 곳.
일테면 그 집에서 이 곳으로 옮겨 온다는 것은 잠시 천국에서 황홀 무아지경에 노닐다가 시궁창으로 돌아 온다는 느낌과 일목 상통하는 것이리라.
가끔 나는 동생도 데리고 그 아이 집으로 갔는데, 일테면 혼자서 감당하는 늦은 귀가 시간의 부담을 동생과 나누면서 공범으로 몰고가는 용의주도함까지 깔았는데, 우리는 그 부자집에서 풍겨오는 아릿한 냄새에 고만 정신이 아득해졌는가 싶다. 그런 저런 공범의식과 성장의 정서적 공감이 지금도 바로 밑의 동생을 쳐다볼 때 문득문득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라 피식 웃음 짓게도 하지만.
그렇게 매일 드나들던 친구집에서 나는 봐서는 아니 될 비밀을 보았으니.
하루는 친구 엄마의 방에 들어 갔는데, 그 친구가 노트를 내리더니 날 보고 읽어 보라는 것이였다.
주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이야기와 잡다한 일상을 기록해 놓으신 일기였는데, 친구가 어떤 한 페이지를 찾더니 읽어 보란다.
무슨 내용인지 세세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귀절은<울었다>는 표현이였다. 세상에, 왕비처럼 아름다운 아줌마의 눈에서 눈물이 나와 울었다는 것. 친구가 말하기를 "울 엄마 일기쓰면서 자주 울어"
순간 나는 눈 앞이 아득해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부잣집에도 눈물이 있는가. 그런 의구심이 들자 나는 그 때부터 짱구박사도 바둑돌 놀이도 심드렁해지고 말았다. 그 뒤로부터는 친구집에 가방을 놓아 두고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우리집은 여전히 서너살 막내동생의 칭얼거림과 우릴 윽박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기차화통 삶아 먹은 크기로 울려 퍼졌는데 그런 것들에 안도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울 엄마는 일기를 쓰면서 홀로 우는 시간은 없었던 것이다.
학년이 바뀌고 그 아이와 내가 반이 갈리면서 내가 부자냄새에 젖을 기회는 영 물 건너 가고 말았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아득하고 까마득하게 내 기운을 배 놓던 시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전상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