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횃대 2004. 4. 19. 23:08
매월 보름날, 대구에 있는 봉무공원 단산지에서는 달빛 산행이라는 행사가 조촐히 치뤄진다.
대구에 계시는 선생님과 동창분들이 주관을 하셔서 치뤄지는데, 시작한 이래로 한 번도 빠짐없이 달달이 그 행사를 주관하고 계신다
어제는 보름도 아니였지만, 서울의 노을재 최언진 시조시인을 모시고 달빛산행과 시조낭송회를 하였다

단산지는 봉무공원을 끼고도는 큰 저수지인데, 주변에는 산들이 둘러싸여 불로동, 지저동일대 사람들이 운동도 할겸 데이트도 할겸 새벽부터 밤까지 시나브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나비생태공원도 자그만하게 꾸며져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가면 좋은 장소다.

저녁 여섯시 기차를 타고 황간에서 출발하여 대구에 도착하니 일곱시 십분, 길이 붐비는 시간이라 택시를 타나 직행좌석버스를 타나 시간이 마찬가지일것 같아 돈도 절약할 겸 버스를 타고 가다. 좌석버스 요금을 몰라 얼마냐고 물으니 아저씨가 희뜩 쳐다보며 1300원이라고 알려준다.
여기 안 살면 그럴 수도 있지름..뭘 그리 쳐다보숑? 속으로 이런 문자 한구절 날리고 자리를 잡고 앉는다

삐그덕거리는 베네통 축구화 가방에는 이틀 전 만들어 놓아 굳은 쑥떡과 떡뽂기 떡이 한 봉다리씩 담겼다.
나도 이제 어쩔 수 없는 촌사람이라, 현금으로 퍼뜩 멀 사서 가는 일이 싫다. 사서 가면 반지르르 뽀대는 나겠지만, 어쩐지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이다. 옛날 친정 고모가(베갯잇 사주신...) 우리집에 오실 때, 꼭 굳은 쑥떡이랑, 마른 가래떡 뻥튀기, 찹쌀 두어되...이런 것 봉지 봉지 담아 보재기에 싸 오시더니, 그 때는 그걸 왜 조금씩 여러가지 가져 오시는가 했는데, 내가 살아 보니 알겠다. 많이는 나눠 먹을 수 없지만, 땡볕에서 농사짓고 자슥처럼 애지중지 가꾸고 기른 것이 이쁘고 탐스러워 그걸 동생네(고모 동생이 우리 아부지셨으니..)식구들 조금씩 먹여 볼라고 그렇게 보따리에 싸서 가져 오신것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게 그런 마음이 들어, 친정에 갈 때는 그렇게 장아찌 담근거 서너 동가리하며 마늘쫑 장아찌들을 봉게봉게싸서 가방에 짠물 내음이 더럭더럭 나도록 싸가지고 가는 것이다.


봉무공원에 도착하니 나를 기다리다 일행들은 벌써 저수지 주변으로 산행을 떠나고 나와 서울에서 온 한선희 시조시인은 늘 모여서 행사를 하는 곳으로 질러 갔다.
원래는 단산지 주변의 야트막한 산봉우리를 오르고 내리면서, 구름 속에서 빤히 얼굴을 내미는 달과 숨바꼭질 하듯이 산행을 하는데, 시간이 촉박하여 그만 단산지 둘레를 도는 것으로 간략하게 하였다.

단산지 주변 오솔길도 못 가장자리를 따라 들쭉날쭉하게 걷는 것이여서 멀리 앉아 보면 손전등이 금방 나타났다가도 다시 숨어 버려 단조로은 길걷기와는 사뭇 기분이 다르다.

다들 산행을 하고 온 팀과 미리 와서 준비를 하던 사람들과 한자리에 모인 시간은 아홉시.
달은 어느새 옅은 구름을 헤쳐나와 둥실 하늘 중간으로 밝고 맑게 떠 올랐다.
물빝에는 산그림자가 그대로 가라 앉아 하늘에 뜬 달과 물 위에 뜬 달이 동시에 시야에 들어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야말로 달은 처처에 떠서 마주 보고 있는 이의 얼굴에도 뜨고, 내 가슴에도 뜨고, 무주공산 팔광 화투패에도 뜨고. 아슴아슴 보고 싶은 그 이의 표정에서 상상으로 뜨고 하는 것이다.

초청시인이신 노을재 최언진 시인의 육성 낭송이 있었는데, 연세에 비해 너무나도 맑고 환하고 고운 얼굴에 넋을 먼저 빼 놓고, 그 다음으로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에 우린 또 한번 놀래 자빠지고 말았으니,
생활 속에 여기저기 자잘한 소품들로 지은 시조도 빼어났지만, 절절히 시조 행간행간을 삶이 무르녹아 스며든 음성으로 낭송하시는데, 고만 가슴이 젖어 철철 홍수처럼 넘치는 것이다.
아하! 시 낭송은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탄복을 하면서 가슴을 쳤으니...

달빛산행 일정이 잡히면 공연히 나는 가슴이 두방망이질이다.
보고 싶은 시인을 볼 수 있다는 것과 낭송시를 들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온갖 기교와 아부와 눈에 뻔히 보이는 술수를 고서방에게 퍼부어 기어이 대구에 온다.
맨날 일만 하는 고서방한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내가 살아가는 삶이 풍요롭기를 원하는 다음에야 ㅎㅎㅎㅎㅎ

다른 것으로 갚아주리 고스방!!

늦은 밤에 친정집으로 돌아와 서너시간 눈 붙이고 새벽 여섯시 차를 타고 다시 황간으로 되돌아 왔지만, 그 눈뜨지 못하는 고단함보다는, 달빛과 사람들과 시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내겐 너무 소중한 시간이리라.
아흐...이제 한숨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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