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박 사일..
음료수병 열 두개에 초컬릿을 채워서 포장해 음료수 통에 넣어 주겠다고 딸이 말했을 때
아들과 나는 배신감에 떨어야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꼬박 삼박 사일동안, 딸은 음료수 병을 씻고 말리고, 포장지를 붙이고 팽이장미를 만들고, 구슬로 테두리를 해서 글루건으로 붙이고 병마다 한지로 뚜껑을 덮고 가는 리본끈으로 묶어 리본 중심에다 작은 구슬을 진주처럼 박았다.
저 정성을 공부하는데 좀 쏟아보...라는 말이 입끝에서 맴돌았지만 꿀떡 삼킨다
나도 살림보다는 엽서 그림 그리는데 더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가
그것고 이것과 다른 점은 씨가리만큼도 없다. 씨가리가 뭔지 모르시는 분. ㅎㅎㅎㅎ
초컬릿 값이 만만찮자 병 하나는 그동안 남자친구와 처음 만나던 날로 부터 기록한 일기장을 열어서 두루마리 편지를 써서 병 하나를 채웠다. 보기보다 잔머리도 굴릴 줄 안다. 이왕 병 하나 그리 한 바에는 다른 아이디어도 내 봐바. 가령 말야...쿠폰을 만들어 넣는거야.
여자친구에게 아이스크림 사 줄 수 있는 쿠폰
학교 뒤편 제방둑을 거닐 때 슬쩍 손 한 번 잡아 볼 수 있는 쿠폰
체육 시간 끝나고 물 한 컵 대접할 수 있는 쿠폰,,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쿠폰의 명세를 나는 만들어 내며 딸을 놀린다. 아, 이렇게 재미있고 행복할 수가.
삼박사일 입이 삐주룩하게 튀어 나오도록 열과 성을 다해 상자를 만들고 채워 놓고는 기진 맥진
둘이 엎어졌다.
그러나, 제 것은 한 알도 축내지 못하게 한지로 봉해놓고 고스방 주려고 만든 계란판 초컬릿은 알게 모르게 다 먹고 없다.
껍데기만 남아 딩구는 계란판을 바라보며...
우리야 이제 껍데기지...알맹이인 니들은 꿈 속에서조차 슬픈일 없이 무럭무럭 자라거라.
정월 열 이랫날
달도 없는 밤길을 밟아 고스방과 아들놈은 오촌 아저씨네 제사를 지내러 갔다.
작년에도 이 날에 지금처럼 앉아 편지를 썼더랬지....
엉겹결에 썼어도 나는 그 편지가 참 마음에 들었더랬다.
또 읽어 보믄 뭐 어뗘? ㅎㅎㅎ
휘영청,
한껏 부풀었다 옆구리가 이틀 기운 달빛을 밟으며 스방과 아들은 제사를 지내러 갔다.
꼭두새벽,
첫 닭 울기 전 향을 피우고 새쌀을 씻어 묏밥을 짓고, 상념없는 절을 올리며 의식이 진행된다. 달은 그 순간에도 천리씩 제 발걸음을 떼어 놓다.
길가의 나무들이 벗은 그림자를 일렁이며 푸른 물길을 제 몸으로 내는 동안
별들은 가지 끝에 앉아 수만의 밀어를 속삭였으리라. "어찌 아는가" 하고
물으면 "그걸 왜 모르는가"로 대답해 주어도 두 사람 사이엔 아모 충돌이 없으리라.
봉지에 조상이 먼저 음복한 음식을 싸서 들고 군청색 정맥이 밤하늘에
신경망처럼 산개한 길을 되짚어온다.
담요에 돌돌 말아 데리고 제사를 지내러 다녔던 어린 아들놈은 이제 앞서거니
뒷서거니 에비의 어깨를 부딪치며 박꽃같이 웃는다.
어머낫, 어머낫, 이러지 마세요. 더 이상 내게 이러시면 안되요
아빠처럼 제 고추에도 털이 났단 말이예요. 아비가 들이미는 손짓에
제것을 손으로 막으며 잽싸게 피할 만큼 어린 자식은 몸이 크고, 생각이 크고.
아비는 문득 민망타가도 헛,헛, 웃음이 난다
자신의 앞머리칼이 쇠어가고 어쩌다 무릎 관절이 어긋나는 발걸음이 잦아져도 저것들, 저 알맹이들이 알록달록 자라니 속상함도 잊고 심중에 드는 바람도 너끈 견뎌낼 수 있다. 나는 껍데기로 비어가도 자슥놈들이 댕글댕글 알맹이로 영글어주지 않는가.
대문을 밀치니 앉아 있던 황소가 화들짝 앞무릎을 펴며 일어난다. 달빛은 오래된 콘크리트 바닥을 맑은 물처럼 환하게 비추인다. 느릅나무 그림자가 아랫채 마루 바닥에 드러 눕고, 늙은 돌감나무 가지가 그 위에 엉기였다. 오래된 이 집.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낮고 아늑한 초가집에서 숨결을 거두었고,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내 아버지....숨결이 이어지는 천장에는 숱한 사연도 한약방 약봉지처럼 매달려 있으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환하게 보이는 그 집의 역사 혹은 내력.
아들놈은 봉지를 부엌 쪽창 턱에다 올려놓고 방으로 사라진다.
묻어온 정월 칼바람이 벗어 놓은 외투에서 톡, 떨어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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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끄고 방으로 와서 편지를 써요
몇 줄쓰니 제사 지내러간 스방과 아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나요.
부산스럽게 현관 계단을 뛰어 오르는 소리,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소리, 신발이 흐트러지는 소리,,, 방에 배깔고 누워 글자를 쓰는데 귀에는 저 소리들이 다 들려요.
12시가 넘으면 시골은 조용합니다.
새들도 제 둥지로 돌아가 노고를 다독이는 시간.
사람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런 싸이클로 살아가는 사람은 대개 아침이 부담스럽지 않은데, 내가 아는 몇몇의 사람들은 지금부터 화들짝 깨어나는 그 무엇에 사로잡혀 밤을 새기도 하겠습니다.
문득,
자연스럽게 내 살어온 자취가 가만가만 떠 오르는 날은
밤의 세포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무장무장 검은 꽃들을 피우고 나는 그 중에 한 송이, 나를 보고 웃는 어떤 날, 혹은 사람에게 손과 마음을 내밀어 밤새도록 그것들과 얘기도 한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