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베갯잇을 시치며

황금횃대 2004. 4. 27. 00:49



그저께는 베갯잇을 빠느라 알몸의 베개를 베고 자다.
베갯잇 없는 베개는 얼마나 매끄러운지 밤새도록 요대기에서 도망가기 바쁘다
몇 번이나 깨어 베개멱살을 끌어 당기지만, 아침에는 역시나 목은 목대로 베개는
베개대로 뚝 떨어져 눈을 떴다


하루 잘 말린 베갯잇을 어젯밤 시치면서,
기다란 시침용 바늘에다 실을 꿴다. 실 끝에 침을 단단히 묻혀서 실을 꿴다
아직은 안경 쓰지 않고도 실을 꿸 수가 있지만, 세월은 그 나마의 사치도 물어가리라.
하얀 바탕색 인견에 촘촘한 누비 박음이 되어있는 아무 무늬도 없는 베갯잇이다.
이 베갯잇은 결혼 할 때 친정의 고모님이 사 주신 것이다.
화려한 외양과 너불너불한 레이스가 그 때의 침구 유행인 것을 감안할 때, 이 하얀 누비 베갯잇은 소박하다 못해 단조롭기까지 하였으니.


그러나, 꿰어진 실에 매듭을 뭉치면서 생각한다. 십 수년 전 내 고모님이 나에게 무엇을 진정으로 선물하고 싶어 하셨는가를.


친정 아버지와는 한 살 터울의 누나, 곧 나의 고모님.
고모는 경남 합천군 쌍책면 사양리에 사셨다.
어려서 우리 형제는 곧잘 시골 고모 집에 갔는데, 고모 집에는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나오는 병을 앓던 시어머니, 박꽃같이 이쁘던 시누이, 그리고 고모의 아이들이 다섯이나 되었다.
그래도 우리집 삼형제가 놀러 가도 싫은 내색 한 번 안 하시고, 바쁜 농사일을 하면서도 때꺼리를 다 챙겨 주셨으니, 지금 내가 결혼하여 살림 살어 보니 그 일이 얼마나 만만찮은 것임을 여실히 알겠다. 가난한 시골 살림에 간식을 어데서 사서 주겠는가, 고모는 감자를 한 퍼내기 퍼 내와서는 우물가에 우리랑 같이 갔다. 얇다란 놋숟가락은 감자를 긁느라 한 쪽 귀퉁이가 달아 나고, 보라색 돼지감자를 긁고 일어서면, 고모의 얼굴은 감자전분 튄 것이 말라서 하얀 주근깨가 온 얼굴에 퍼졌다.
농사일 하느라 까맣게 그을린 손과 얼굴에 하얀 주근깨, 그 고단한 일상을 철 없는 우리는 전혀 눈치도 채지 못했다.


감자를 삶아 먹고, 겨울이면 고구마를 쪄먹고, 여름이면 왕골짜는 재료인 골을 짜갠다
골 껍질을 벗겨서 칼로 쪼개는 일은 손이 많이 필요한 일이라서, 낮에는 골 안 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다슬기를 잡고 놀다가, 저녁이면 모깃불을 놓고서 골 짜개는 일을 했다
모두 다리를 길다랗게 뻗치고, 어른들이 골을 짜개면 우리 아이들은 맞은 편에 앉아서 맞잡은 골을 옆에다 얌전히 내려 놓았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마당은 웃음이 터져 나오고, 그러다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면, 미처 거두지 못한 별들의 웃음 자욱이 보조개의 남아 반짝거렸다.


무슨 일이든 열성이셨던 고모, 셈본도 빠르셨고, 초석 자리든, 꽃자리든, 왕골로 자리를 짜서 가져가면 누구보다 높은 값을 받아 오셨던 고모.
힘든 살림에 한 번도 푸근한 몸을 가지지 못한 고모는 언제나 가냘펐다.
그러나 강단 하나로 버티고 산 삶에 암세포는 가차없는 공격이 가해졌고, 우리집 첫 포도가 익기 보름 전쯤 고모님은 세상을 뜨셨다.


가신 분 생각하며 한 땀, 한 땀, 베갯잇을 시친다.
몇 땀 가지 않으면 베개는 뽀얀 옷을 입고 신선처럼 앉았다.
시도 때도 없이 돌려대는 세탁기에 베갯잇인들 온전하랴. 찬찬히 들여다 보니 군데군데 누비 바느질이 떨어져 있다.
울컥 고모 생각에 목구멍이 뜨끔하다.
베갯모 원앙 수침이 환히 눈에 들어온다.
고모는 흔하고 정교한 수는 아니지만, 그 많은 그림 중에 이 그림을 골라 나에게 주셨고 아무리 때가 묻어도 세탁만 하면 다시금 하얗게 돌아와 주는 흰색을 베갯잇으로 골라 주셨다.
‘사는 일은 때가 묻는 일이다, 끊임없이 얼룩이 지고, 낡아 가는 일이다. 그러나 마음먹고 그것을 깨끗이 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상순아. 너는 언제나 이 하얀 베갯잇처럼 깨끗하게 밝게 살아 갈 수 있을 거다’
설령 내 고모님이 나에게 직접 이렇게 속삭이시진 않으셨지만, 고모의 그 알뜰하고 살뜰한 정을 생각하면, 휘황하고 현란한 침구 가게에서 단호히 골라 내신 그 야무진 손길의 뜻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그 베개와 같이 사들인 몇 가지의 다른 레이스 베개들은 이미 다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고모의 베개는 지금도 우리 부부의 머리에서 하루도 떠날 날이 없고, 잡아 묵을 듯 지지고 볶고 대판 싸와 재낀 날도 우리는 예의 그 베개를 나란히 놓고 베고 잔다. 가끔 베갯밑 공사도 벌리면서.


내일은 대전 나가서 재봉틀 벨트를 사 와야겠다
베갯잇 누비가 떨어진 곳을 다시 꼼꼼히 박으며 고모가 한 땀 한 땀 나에게 수 놓 듯 알려 주려 했던 삶의 고소한 맛이 무엇인가 오래오래 기억하고 살 수 있도록.



전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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