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횃대 2006. 3. 24. 12:01

 

 

89년 결혼을 하고 가게부를 바로 쓰기 시작했다.

월급도 없던 시절.

그냥 필요하다고 돈을 달라고 하면 고스방이 만원, 오천원, 이렇게 줬다.

그 관행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작은 칸에 연도를 적고 나름대로 생활자금에 대한 설계를 했다

직장 다닐 때는 숫자며 금액난을 메꾸는게 지겨웠었는데 그 생활을 막상 떠나고 보니 칸마다 숫자를 적는다던지, 명세를 가지런히 적는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 때는 올까 싶으잖던 2006년 내 나이 마흔 넷.

스물여섯 그 때는 정말로 그 나이가 내게도 올까..하였는데. 세월은 어김도 없고 삐끌림도 없이 왔다.

 

 

결혼하고 신혼방으로 꾸몄다는 작은 방은 불을 때서 난방을 하였다

어머님방, 큰아즈버님방은 연탄불이였다.

세상에...저녁마다 불을 땔려면 옷자락이며 손끝이 검댕이로 새까맣게 변했다

눈은 연기로 매워서 빨간 토끼눈이 되고.

그러다 아즈버님이 거처를 인천으로 옮기고 그 방으로 우리가 간단하게 이부자리만 들고 옮겼다.

연탄불 방이 그렇게 좋은지..불 안 때니까 아주 살 것같았다.

 

한 달 우유 대 놓고 먹는데 우유값을 남편에게 타 낼려니, 아직 이 집에서는 그렇게 우유 대 놓고 먹어본 적이 없는 집이라 돈 타내기가 뭐했다. 월급으로 주었으면 적당히 안배를 하였을터인데 그게 없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구두 닦아 주면서 슬슬 우유값을 타 낼 작업을 했나보다.

 

 

 

종일 집 안에만 있으니 갑갑했다.

가끔 밤 늦게 고서방이 영동에 가스를 넣으러 가면서 나를 태워갔었는데 하루는 만원짜리를 주면서 과자를 사 오란다. 그래서 얼씨구나 좋다하며 과자를 이천원어치 사고 거스름돈을 고스방에게 주니 잔돈 바꿀려고 일부러 만원을 줬는데 과자를 이천원어치나 사 오면 어떡하냐고 꾸지람을 했다. 아직도 그 풍경이 생생이 생각난다. 과자 봉다리를 끌어 안고 내고 얼마나 소리 없이 울었던지. 달구똥같은 눈물이 뚝, 뚝 떨어져 내 발등이 깨질 형편이다.

돼지고기 한근에 천 오백원 하던 시절이였으니...

 

 

 

나도 아기를 가져 애기 이불을 친구랑 같이 사러 갔었다.

아직도 애기가 나올라면 멀었는데 고스방을 졸라서 돈을 얻어 애기 용품을 사러갔다.

애기용품보다 대전씩이나 나가서 바람 쐬는게 더 좋았겠지.

대전 황간 직행버스 요금이 지금은 삼천이백원이니 그 때 구백육십원할 때와 얼마나 물가가 오른건가.

그 와중에도 서점에 들러 한글 서예 교본을 사가지고 왔다.

그 땐 왜 그리 서예가 하고 싶던지.

애기가 점점 커져 배가 불러왔지만, 그 부른 배를 꾸구리고 앉아 신문지에다 글자연습을 했다.

지금은 부른 배도 아니고, 시간도 많지만 붓글씨 연습을 전혀 안한다.

무엇이든 못견디게 하고 싶을 때가 있나보다.

 

 

 

덥디 더운 여름 날,

남편과 처음 쌈을 했다

고스방 싸움 컨셉이 집기파손이란걸 그 때 처음 알았더랬지.

이후로도 쭈욱 싸울 때마다 고스방의 컨셉은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고서방이 엎어버린 밥상에 식탁의자를 집어 던져 원목의자 하나를 박살 내고는 그 버릇 고쳤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십칠년이 넘어서 십팔년째 접어든다.

씨팔씨팔 그렇게 살다보니 저 당시는 올까싶으잖던 마흔넷의 나이가 되었다.

슬프냐고?

 

예전에도 말했지만.....천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