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피는 삽작
삽작 앞, 작약이 마악 몽우리를 맺을 즈음 포도농사는 서서히 손길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논에는 논대로 논두름을 해야하고, 모판을 자주 들여다보아 모끝이 냉해를 받을까 걱정을 해야하며, 볕이 따가우면 따가운대로, 비가 오면 비 오는대로 마치 갓난 아기를 들여다보듯 마음쓰며 자주 그들의 안부를 살펴야 한다.
포도밭에는 이른 순들이 우후죽순 뻗어나간다.
육손도 따주어야하고, 벌로 뻗은 벌순도 솎아줘야한다.
그야말로 한 나무, 한 나무 발걸음을 찬찬히 옮기며 그들의 생육을 살피고 은은한 향기를 흩어 놓는 포도꽃이 잘 달려 개화를 하는가도 살펴야한다.
작년보다 시절이 늦은가 포도나무의 생장 진도가 조금 늦은 듯도 한데, 이제 날이 따숩고 정수리에서부터 땀이 줄줄 흐르는 계절이오면 포도는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올해는 사무실에 나온다고 포도밭에는 걸음도 하지 않았지만, 내 기억이 쉬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라면 분명 포도밭의 풍경은 이러하리라란 믿음이 있는게지.
우리집 삽작앞을 오가던 뒷뜸 선익이 아저씨가 무단히 낮에 논에서 일하고 저녁에 집으로 와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돌아가셨다.
선거 사무실에서 하루 일을 접고 터덜터덜 걸어서 동네 입구 굴다리를 마악 올라서는데 왜애앵~ 앰블런스가 급한 울음을 뱉으며 내 앞을 지나간다.
멀리서 보고 있던 박장군아짐마가 날 보고 누가 병원에 급하게 가느냐고 묻는다
나도 이제 마악 들어서는길이라 잘 모르겠는디요
상민네 집 골목에서 차가 나오던걸...깜짝 놀라 집쪽으로 뛰어가니 쌍둥이 아빠가 나온다
"아저씨 누우네 집에서 환자가 나왔어요? 혹시 선길네 할마이가?"
"아니...선익이가 무다히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네"
"예에? 아니 왜요?"
"몰르지. 논에 갔다와서 약방에서 소화제 사먹고 들어왔는데 저렇다고 하네 병원 가보는길이여"
담날,
아침에 담 아래서 동네 아지매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듣긴다
"선익이가 고만 죽었다네"
"멀쩡하던 사람이 그렇게 억, 소리도 못하고, 말 한마디 못하고 죽다니 살아도 산 목숨이 아녀"
누구나 그의 죽음에 대해 한 마디씩 놀라움과 낭패감을 감추지 않고 표시를 했다.
작년 이맘 때, 선익이 아저씨는 나를 불러 세우고는
"아지마이, 내년 봄 되글랑 날 저 작약 몇 뿌리만 분양해주시면 안 될까? 지나 댕기다보면 저 꽃이 어찌나 이뿌던지...우리집 화단에서 심어두고 싶어서 그래."
"그렇게 이뿌면 뭐 어머님한테 말씀드려서 나눠 심지요."
그러고선 새 봄이 되었고 그 때의 일은 까마득히 잊은 채 나는 나대로 사무실에 나왔고 그는 그대로 농새일 돌본다고 정신이 없었으리라.
그는 새로 난 고속도로를 바라보는 동산 중턱, 작은 무덤 속으로 새 띠를 두르고 누웠고, 나는 이제서야 활짝 피어난 작약을 아침저녁으로 보며 대문을 나서고 집으로 들어간다.
사람의 일생이 어처구니 없이 덧없다 하더만, 선익이 아저씨처럼 저렇게 덧없을수야.
작년 동네 사람들은 제쳐놓고 자기집 식구들만 불러서 먹고, 저녁 나절에는 밴드 불러 지네들 식구끼리만 노래불르고 난리지긴다고 동네 사람들 어지간히 입방아에 올려 콩당콩당 그들의 일을 찧어쌌더니, 그런것도 부질없고 지름값이 올랐다고 화목보일러로 교체해 놓고는 나무만 눈에 띄면 한 경운기씩 바리바리 나무를 해다 나르던 그 억척도 다아 부질없다.
나는 나대로...저 작약 한 뿌리 캐달라고 할 때 봄 까지 뭐 기다릴거 있세요 지금 가져 가시지..그 말 한 마디 쉬이 하지 못하고 어머님 허락을 받아야한다며 미적미적 넘긴 것도 걸리고.
행여나 그 아저씨가 자기 마당에 뾰조록히 올라오는 작약순을 햇봄에 미리 보았다면, 또 마음이 환해져서 그렇게 죽음을 맞이 하지 않았어도 되었지 않을까...
가만히 앉았으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지...그게 또 사람의 일이기도 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