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일
드디어 우리도 오늘 포도밭에 봉지를 쌌다
해마다 영동 주곡리 형님네 이웃 아주머니들이 우리집에 와서 봉지를 싼다
새벽 다섯시에 주곡리 회관앞에 차를 대면 아주머니들이 고스방 차로 밭에 온다
일명 <돈내기 봉지싸기>
봉지 한 장당 17원으로 봉지 싸기를 하는데 많이 싸는 아줌마는 4500장까지 싼다
그야말로 손놀림이 바람 같아 앞치마 주머니에서 언제 봉지가 나와 포도에 갖다 붙여
철사고리를 뺑잡아 돌리는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나같이 몇년 농사 지은 사람이 날일로 하루 종일 봉지를 싸며 한 이천장 정도 싸는데
거의 두배도 넘게 일한 양이 차이나니 새벽길 나서 돈내기 일 나설만 하다.
어제는 그 비를 다 맞아가며 우의를 입고 포도 알솎기를 하다
하루종일 비를 맞으면 드는 생각이란게 사람도 어쩌면 식물같구나. 종일 물을 뿌려주니
싱싱할 밖에. 진짜로 하루종일 햇볕 내리쬐는 것보다 비가 오는게 꼬라지가 서글퍼서
그렇지 훨씬 덜 지친다.
오늘에사 아들놈 학교에서 음성꽃동네로 이삼학년이 봉사활동을 간다고 한다
선생님 도시락 열개를 싸느라고 김밥을 서른줄 싸다
뒷집 상이엄마가 새벽 다섯시에 우리집으로 와서 같이 싼다
놉 얻은 사람 아침준비하랴 김밥 싸랴 아이들 밥 챙겨주랴 그야말로 없는 부랄에
요령소리 나게 생겼다.
일년에 한 번씩 만나는 주곡리 아줌마들.
그 중에는 일흔두살이신 할머니도 계신다.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비유를 멋지게 하는지..
가령 포도순 결속한 것이 풀어져서 포도무게에 못이겨 순이 밑으로 쳐져 늘어져 있으면
"어이 애기엄마, 저기 허옇게 목 매달고 있는거 저가 짜매고 와"
포도 봉지를 싸 놓았으니 먼데서 보면 영락없이 허옇게 목매달고 쳐진 모습이다.
작년에 성희 아줌마는 해필이면 오늘 고추장단지가 깨졌다고 말해서 그게 뭔 말인가 했더니
생리가 시작되었다는 표현이였다.
그런 아줌마가 올해는 식사 후 약을 드신다. 무슨 일인고 실쩌기 물어보니 갱년기 장애인
우울증이란다. 그래서 약을 먹는다네. 작년에 깨진 고추장단지가 고만 영 깨져버렸나보다
심각하게 생각을 하지 않고 갱년기 장애니 괘안타고 이야기 하니 고개를 끄덕하신다
옆에서 "아는 병인 걸 뭐.."
할머니는 작년에는 몸이 편찮으셔서 못 오셨는데 올해는 합류를 하셨다
동네에서 소문난 까칠한 할머니신데 우리집에서는 그리 까다롭게 안 하신다
그 네 사람이 딱 조가 맞아서 항상 같이 다닌다.
골짝 포도밭에서 일하다보면 으례 옛날 옛날 호랭이 담배말아 먹던 시절 이야기가 나온데,
"있잖아, 옛날에 내가 창수엄마하고 고사리를 뜯으러 갔잖아. 근데 어떤 무덤 옆으로 고사리가 나래비를 조로록 서며 흑지게 났더라고. 묏등 위에도 오보록히 났지만 그건 안 뜯고 주변으로 신나게 뜯어가는데 갑자기 눈앞에 이만한 구멍이 하나 있어 그래서 보니까 구멍이 버얼개.
어이구 여우굴이야. 여수가 묘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는 시신을 물어뜯은거지. 옷가지도 있고 하니."
겁많은 우리 시누형님이 그 소릴 듣고 진저리를 치며
"어매야, 놀래서 시껍을 하고 고사리 다래끼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도망왔겠네?"
"도망은 무슨 도망, 고사리밭이 훤한데 도망은 왜 가?거 다 뜯어서 왔지"
"어이구, 간도 커요. 우리는 겁이나서 그런 구멍만 봐도 고사리고뭐고 다 내던지고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갈낀데"
작년에는 동네 아저씨 바람피우는 이야기를 하고, 제작년에는 미야엄마 밥 많이 먹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 전전해는 또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포도봉지 18000장쯤 싸다
봉지봉지 포도는 계절이 흐르는대로 까맣게 익어갈거고.
나는 이제 포도일은 손 놓고 벌겋게 익은 자두밭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