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미영(무명) 밭에 잠들다
황금횃대
2004. 6. 17. 10:00
내 큰아버지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당신 아래 동생인 우리집에는 삼남일녀가 곰새끼처럼 뒹굴었지만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큰집에 정월 초 하룻날 세배를 가면, 큰어머니는 부엌에서 나오시지 않으시고 큰아버지 혼자 쓸쓸히 세배를 받았다. 나란히 꿇어 앉은 우리들에게 세뱃돈을 주시며 "올해도 건강하그라"덕담을 나눠 주셨다
세배를 드리고 제사지낼 준비를 하면 큰아버지는 먹을 짙게 갈아 지방을 쓰셨다. 우리집 제사에 쓸 것도 일년치를 한몫에 써 주셨다. 내가 관심을 보이면 나를 바라보며 저것이 사내놈이였으면 좋았을것을...하며 아쉬워하셨다. 커서는 이름 짓는 법도 가르쳐 주시고, 택일 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다. 토정비결 보는 것도 남김 없이 가르쳐 주시고, 한자를 쓰시다가도 붓을 넘겨주시며 날 보고 한번 써 보라하셨다.
획순이 틀리면 그것을 바로잡아 주시고, 삐침이나 책받침변을 쓸 때는 붓끝은 누르는 방법을 매번 설명을 하셨다. 그러고는 그윽히 나를 또 바라보시면서 산쁘라 어금니가 살짝 보이게 지긋이 웃으셨다. 그런 것을 큰엄마는 고깝게 바로보면서 "얼릉 그거 치우고 차례상을 차리라"고 성화하셨다.
나와 둘째 동생을 데리고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제목도 잊어먹지 않는다 <십이인의 여걸>이란 중국영화다. 왕의 열두딸이 무예가 출중하여 침범한 적을 막아낸다는 내용이다. 영화 장면 중 하나는 동생과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또렷이 기억을 한다. 영화를 보고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주셨다. 탁자 위에 나무젓가락이 동글동글해서 참 신기해했었다. 짜장면을 먹는 동안 짜장면 앞길을 합승버스가 달리며 뽀얀 먼지를 뭉글뭉글 게워냈다. 타박타박 큰아버지와 나와 동생이 먼길을 걸어왔다.
큰아버지는 책을 참 좋아하셨다. 일본에서 중학교까지 마쳤으나 그것으로 생의 방편을 삼지 않으셨다. 읽을 책이 하나도 없는 우리집과는 달리 큰집에는 큰아버지가 보던 책이 많았다. 큰엄마가 우리 가는 것을 반기지 않았는데도 나는 책 보려고 자주 갔다. 거기서 감자도 읽고 박정희도 읽었다. 그즈음 나는 초등학교 삼학년 아니면 사학년이다. 감자를 읽으며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들을 책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고, 갈 때마다 단편을 읽으며 관음증환자처럼 혼자 열에 들떠 있었다.
한번은 동촌유원지에 우리를 데리고 가셨는데 동생과 내가 회전그네를 타는 동안 큰엄마와 큰아버지는 우리를 올려다 보며 손을 흔드셨다. 큰아버지는 색안경도 끼시고 큰엄마는 작은핸드백도 들었다. 울엄마 울아버지는 아이넷을 키우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네가 한 바퀴 빠르게 돌아 우리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도 조카들을 데리고 나왔다고 생각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조금 모자라는 츠자가 한 명 있었다. 나는 그녀를 언니라고 불렀다. 늘 방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큰아버지가 낳은 자식을 생각을 했는데 알고보니 씨받이로 데려온 여자였다. 아이를 가졌으나 큰엄마의 등쌀에 유산을 하고 다시 어디로 보내졌다. 왜 갔는지 이유도 그 땐 알 수 없었으나 나중에 엄마가 이야기를 해 주셨다. 아이도 실패하지 않고 같이 살았다면 지금 큰집은 어떤 모습일까
만나면 늘 웃어주시고 반가와하셨다
우린 큰아버지는 엄청 따랐는데 큰엄마가 하도 쌀쌀맞게 우릴 대해서 큰집에 정이 붙지 않았다. 그게 안스러워 울아부지는 큰아버지를 끔찍히도 위했다.
지난 봄, 직장암 판정을 받고 개복해보니 암이 온 사방으로 퍼져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임시 수술만 하고 회복실에 있을 때도 책을 손에 놓지 않으셨다. 병수발을 하던 올케가 놀랬다. 올해 연세 일흔둘.
경남 합천군 쌍책면 건대리 베태제 산말래이
유월 열닷새날, 오전 10시 하관.
시집 와서 여기까지 미영 농사를 지으러 왔다고 엄마는 땀을 닦으며 이야기한다.
"형님하고 내하고 미영밭을 메러 자주 왔지러. 형님이 적잖히 내게 시집살이를 시켰지만 나는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할 줄 아는 것만 했다고. 지금 생각하니 형님이 어지간히 속터졌을끼다"
포크레인으로 흙을 파니 산 흙이 팥고물같다.
아담하고 푸른빛이 도는 떼를 입히고 맏상주 앞세워 산소 가장자리를 밟으며 돈다.
아, 이제 여길 언제 또 와 볼까
여자는 시집가면 본적조차 바뀌니 먼먼 내 친정 조상들이 고즈넉히 잠들어 있는 베태재 산말래이 이 땅을 언제 또 밟아보나.
고개 돌려 푸른 산빛을 둘러 본다. 큰아버지의 환영은 성긴 흰 머리카락을 바람에 간간 날리면서 산쁘라 어금니를 살짝 내보이며 웃고 계시나니.
미영 밭으로 영면의 시간에 들어가신 큰아버지
가끔은 아린 기억들과 함께 보고 싶을 겁니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당신 아래 동생인 우리집에는 삼남일녀가 곰새끼처럼 뒹굴었지만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큰집에 정월 초 하룻날 세배를 가면, 큰어머니는 부엌에서 나오시지 않으시고 큰아버지 혼자 쓸쓸히 세배를 받았다. 나란히 꿇어 앉은 우리들에게 세뱃돈을 주시며 "올해도 건강하그라"덕담을 나눠 주셨다
세배를 드리고 제사지낼 준비를 하면 큰아버지는 먹을 짙게 갈아 지방을 쓰셨다. 우리집 제사에 쓸 것도 일년치를 한몫에 써 주셨다. 내가 관심을 보이면 나를 바라보며 저것이 사내놈이였으면 좋았을것을...하며 아쉬워하셨다. 커서는 이름 짓는 법도 가르쳐 주시고, 택일 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다. 토정비결 보는 것도 남김 없이 가르쳐 주시고, 한자를 쓰시다가도 붓을 넘겨주시며 날 보고 한번 써 보라하셨다.
획순이 틀리면 그것을 바로잡아 주시고, 삐침이나 책받침변을 쓸 때는 붓끝은 누르는 방법을 매번 설명을 하셨다. 그러고는 그윽히 나를 또 바라보시면서 산쁘라 어금니가 살짝 보이게 지긋이 웃으셨다. 그런 것을 큰엄마는 고깝게 바로보면서 "얼릉 그거 치우고 차례상을 차리라"고 성화하셨다.
나와 둘째 동생을 데리고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제목도 잊어먹지 않는다 <십이인의 여걸>이란 중국영화다. 왕의 열두딸이 무예가 출중하여 침범한 적을 막아낸다는 내용이다. 영화 장면 중 하나는 동생과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또렷이 기억을 한다. 영화를 보고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주셨다. 탁자 위에 나무젓가락이 동글동글해서 참 신기해했었다. 짜장면을 먹는 동안 짜장면 앞길을 합승버스가 달리며 뽀얀 먼지를 뭉글뭉글 게워냈다. 타박타박 큰아버지와 나와 동생이 먼길을 걸어왔다.
큰아버지는 책을 참 좋아하셨다. 일본에서 중학교까지 마쳤으나 그것으로 생의 방편을 삼지 않으셨다. 읽을 책이 하나도 없는 우리집과는 달리 큰집에는 큰아버지가 보던 책이 많았다. 큰엄마가 우리 가는 것을 반기지 않았는데도 나는 책 보려고 자주 갔다. 거기서 감자도 읽고 박정희도 읽었다. 그즈음 나는 초등학교 삼학년 아니면 사학년이다. 감자를 읽으며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들을 책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고, 갈 때마다 단편을 읽으며 관음증환자처럼 혼자 열에 들떠 있었다.
한번은 동촌유원지에 우리를 데리고 가셨는데 동생과 내가 회전그네를 타는 동안 큰엄마와 큰아버지는 우리를 올려다 보며 손을 흔드셨다. 큰아버지는 색안경도 끼시고 큰엄마는 작은핸드백도 들었다. 울엄마 울아버지는 아이넷을 키우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네가 한 바퀴 빠르게 돌아 우리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도 조카들을 데리고 나왔다고 생각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조금 모자라는 츠자가 한 명 있었다. 나는 그녀를 언니라고 불렀다. 늘 방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큰아버지가 낳은 자식을 생각을 했는데 알고보니 씨받이로 데려온 여자였다. 아이를 가졌으나 큰엄마의 등쌀에 유산을 하고 다시 어디로 보내졌다. 왜 갔는지 이유도 그 땐 알 수 없었으나 나중에 엄마가 이야기를 해 주셨다. 아이도 실패하지 않고 같이 살았다면 지금 큰집은 어떤 모습일까
만나면 늘 웃어주시고 반가와하셨다
우린 큰아버지는 엄청 따랐는데 큰엄마가 하도 쌀쌀맞게 우릴 대해서 큰집에 정이 붙지 않았다. 그게 안스러워 울아부지는 큰아버지를 끔찍히도 위했다.
지난 봄, 직장암 판정을 받고 개복해보니 암이 온 사방으로 퍼져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임시 수술만 하고 회복실에 있을 때도 책을 손에 놓지 않으셨다. 병수발을 하던 올케가 놀랬다. 올해 연세 일흔둘.
경남 합천군 쌍책면 건대리 베태제 산말래이
유월 열닷새날, 오전 10시 하관.
시집 와서 여기까지 미영 농사를 지으러 왔다고 엄마는 땀을 닦으며 이야기한다.
"형님하고 내하고 미영밭을 메러 자주 왔지러. 형님이 적잖히 내게 시집살이를 시켰지만 나는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할 줄 아는 것만 했다고. 지금 생각하니 형님이 어지간히 속터졌을끼다"
포크레인으로 흙을 파니 산 흙이 팥고물같다.
아담하고 푸른빛이 도는 떼를 입히고 맏상주 앞세워 산소 가장자리를 밟으며 돈다.
아, 이제 여길 언제 또 와 볼까
여자는 시집가면 본적조차 바뀌니 먼먼 내 친정 조상들이 고즈넉히 잠들어 있는 베태재 산말래이 이 땅을 언제 또 밟아보나.
고개 돌려 푸른 산빛을 둘러 본다. 큰아버지의 환영은 성긴 흰 머리카락을 바람에 간간 날리면서 산쁘라 어금니를 살짝 내보이며 웃고 계시나니.
미영 밭으로 영면의 시간에 들어가신 큰아버지
가끔은 아린 기억들과 함께 보고 싶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