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정선으로
제 1신
이즈음 내가 속아지가 아주 못때졌어요
그런 내가 못바땅해서 마음이 편치 않지만 쉽게 풀리지도 않아
예전에도 내가 그랬던가 싶게 마음씀씀이가 외곬로 꼬이는거라
하루종일 입도 잘 안 떼고 묻는 말이 있으면 마지못해 대답만 하고 있지요
마음이 널찍하니 너럭바위 같에야 나도 신명나게 놀고
넘도 앉아 쉬어가시요 할텐데 아주 바늘꽂을 틈이 안 보이네.
그러니 나도 억수 피곤할 밖에
며칠간은 올자두를 땄거등
먼저 익은 것들은 미처 손 쓸 여가도 없이 땅바닥에 벌겋게
떨어져 누웠고, 그 비치레에도 자두는 익어 빛깔곱기가 그만이라
맛 또한 그럭저럭 제맛을 내네. 10kg 한 상자에 이만이천원도 받고,
이만 사천원도 받았네. 많이도 못따고 하루에 열댓상자 가져가요.
어제는 비가 얼마나 퍼붓던지. 그래도 우의를 입고 눈으로 들어가는
빗물을 훔치며 자두를 따는데 사람이 시각적 흡족함으로 얼마나 비애를
삭감시키는지 어제 똑똑히 알았네. 뭣이든 아름답고 볼 일이여.
자두를 따면서 몇 번이고 그녀를 생각하지
붉은 자두를 받아 놓으면서도 연신 사진을 찍어 대던.
같이 살면 올해도 놀러와 자두를 따고, 물렁물렁한 것은 가져가
동네 할머니들 나눠 먹을텐데..싶은
다, 지나간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여.
집에 오니 비에 젖은 몸에, 땀에 쉰내가 난다.
이렇게 쉰내가 나도록 살아야하는 그 生이란것 또 무언가
여자가 귀찮아지면 어쩌누
보살피고 쓰다듬고 마음써야할 한 송이 꽃이라 생각해야지.
여자란 아무리 타고난 전사라해도 따뜻함을 좋아하는 동물인걸...어쩌누.
같이 가고 싶다면 델꼬가지 그래. 페이스조정은 그녀가 알아서 하겠지
너무 의식적으로 멀리하는것도 좋은게 아녀. 속마음에게 깊이 물어봐바여.
그럼 그녀에 대한 답이 나올테니.
2004. 7. 8.
제 2신
오랜만에 햇살을 보게 되네.
가끔 인터넷에서 글을 읽어 보면 <햇살이 미치도록 좋다>라는 표현을 하는데
나는 그게 햇살이 사람 미치게 좋다는건지, 아니면 사람이 미칠만큼 햇살 그 자체가 좋다는 건지 구분이 안되더만. 그게 그말이라구? 그게 그말이고 그 뜻이라해도
뜯어보면 묘한 뉘앙스가 있다.
올자두를 다 따고 이제 늦자두만 남겨 놓았네
휴가일정을 잡고 싶어도 저누무 자두가 언제 익을지 몰라.
자두를 다 따야 어디건 가라고 할텐데 방학 전 아이들 설득하기는
올 여름 우리 설악산 한 탕 뛰자 했건만 차 없이 열차 타고 갈 생각하니 여간 번거롭지가 않네.
생각 같아서는 남편 영업 입금 물어 주고 차를 전세 내볼까 생각도 해 보지만, 꼼생이 남편이 yes라 할지는 두고 볼일. 아직도 설악산에 가 보지 않았다는 남편.
그 남편을 위해서도 설악을 가보고 싶다.
자두 다 땄다고 오늘 오전에는 벼논에 약을 치고 오후에는 대전 모임에 다녀올 예정. 스방한테 모임있다고 하니
"여편네들 쓸데없이 모여 수다 떠는데 뭐할라고 갈려는가"한다.
"그냥 바람쐬로 가는거지."
이렇게 말하면 예전에 친정엄마는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허이구..우리 동네는 바람이 안 불어서 먼 곳까지 바람 쐬러가나?"
바람이야 이 동네라고 왜 안 불겠는가 일테면 낯선 바람을 쐬러 가는거지.
오이가 쭉쭉빵빵으로 잘 자라길 그물망 씌우면서 기원이나 하나 몰라.
농사일이란게 힘이 드니 기원 이런 건 늘 때기나발 치고 그냥 빨리 끝내야지 하는
마음만 들게 하지요.
나도 여담 하나,
미국 켈리포니아에 친구가 살어
내가 메신저를 잘 안하면 소식이 궁금해서 프로필에다 메모를 남기는데 거기서 당신이 지운 그 메시지, 그걸 읽고는 얼마나 부럽고 샘이 나던지 읽고 또 읽었다하네.
정작 나는 그걸 읽고도 아무 삐리리한 느낌이 없던데 왜 주위에서 그렇게 질투의 화신들이 되어 몇 줄 되지 않는 방명록에서 사라지게 하는지 ...끌끌.
속으로, 역쉬 소설가의 메시지는 짧아도 향기가 다르나벼. 의도하지 않는 감정까지 읽는 사람에게 전달이 되나? 했지를.
경운기에 물이 다 받겼는지 모르겠다. 논에 가서 농약 줄 잡아줘야재요. 안녕.
2004. 7. 10
제 3신
풀들이 들깨보다 더 크다.
자두를 따면서 저 풀 좀 매야하는데 하면서도
자두따고 집에 가서 점심 먹고 씻고 나면 꼼짝하기가 싫어. 그래서 누질러 앉아버리면 그만 그 날은 다 가네
진정한 농사꾼은 연이어 일을 해치울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멀었나벼
어제는 치맷자락 휘날리며 고급 음식점에서 갈비를 뜯네, 양주를 마시네, 아카시아 술에 와인에 소주에 중국술까지 갖가지로 마셔대다가 오늘은 몸빼 차림으로 손톱이 아프도록 김을 맨다
오후 들자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서 장갑은 흙디배기가 되고 손가락 관절은 슬슬 아퍼온다.
두어골만 더 매면 되는데 고만 하기가 싫어 개울물 내려가는데 호미자루 싸악 씻고, 손 씻고 하산하다.
마침 빗방울도 내 작정을 눈치챘는지 쏴아 내리기 시작하고 지척의 산들도 모두 순식간에 비 안개옷을 입고 섰다. 이렇게 비 오는 날 여행가면 좋은데......
눅눅하니 뉘 손길처럼 따라 붙는 습기를 뒷덜미에 느끼며 우산의 방향을 요리조리 눕혀가면서 물이야 슬리퍼 안으로 스미든 말든, 첨벙철벅 물웅덩이를 일부러 지나고 어느 가게 물홈통으로 빠져 나오는 지붕물에 발바닥에 남아 있는 잔모래를 헹궈내면서 랄랄라라, 랄랄라라 네박자로 걸어도 좋으리 아니아니 날아도 좋으리.
참, 참,
전에 반야사 문수전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네
두 부부가 어지간히 신실해 보이더만
별로 기대는 안 했지만 생각은 났더랬지요
아줌마가 내 주소를 적은 봉투를 혹 잃어버린게 아닐까. 이러다가 아니야 아닐거여. 원래 필름이 들어가는 사진기는 1 Roll을 다 찍어야 인화를 하러가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얼마전, 두번째로 문수전에 혼자 올랐지. 그때야 건성으로 문수보살에게 안면만 트고 왔지만 어느 날 거기가 참 가보고 싶어서 오토바이 타고 갔잖여
아무도 없는 암자에 고요한 오후의 밝음이 문 안으로 자리하고 방석도 정성스레 내려 놓고 절을 한다.
백팔배.. 세다가 잊어먹었으니 더 했으면 더 했지 모자라진 않았으리라. 서른 몇 번째 절을 하는데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와. 문수보살을 바라 보니
"내가 뭘 어쨌게? 괜히 저 혼자 난리 지랄이여"
이러는거 같아. 그걸 알면서도 어찌 그리 뜨겁게 눈물이 나오는지. 그러다 불쑥 아는 아줌마가 들어와 눈물을 꾸덕꾸덕 말렸네
"무엇을 위해, 무얼 빌려고 절하지 말고 상순아 업장소멸을 위해 절을 해봐"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두 살 아래 조폭중간보스노릇하던 놈이 몇년전에 그렇게 내게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지금은 광고 계통의 일을 하는데 대학 다니며 깡패짓하느라 집 몇 채 말아먹었다는(믿거나 말거나)
아직도 아버지의 부에 대해 못마땅하다고 얘기하는 놈이 불교에 대해선 제법 진지하게 내게 이야기를 했다.
2년 전인가? 부산가서 본 적이 있는데 한 여름에도 양복에 넥타이에 그렇게 조폭냄새를 팍팍 풍기더니.
어쩌다 경부고속도로 타는 날이면 뜬금없이 전화도하고 그러더니 이즈음은 통 연락이 없다.
사람의 인연이란 다가 왔다 멀어지는. 그래서 누구는 차창 밖의 가로수에 비교를 하기도 한다만 가만히 생각하면 참 맞는 말이네..박수를 '짝'소리나게 치고 싶지.
멋들어진 비유야 하면서.
저녁 아홉시가 다 되어가는데 빗줄기가 점점 세진다. 중부지방 호우경보라던데 또 얼마나 사방 땅 우에 난타공연을 펼칠지.
아버님은 소화가 잘 안된다며 식사를 많이 안 드시고 어머님은 신경을 바짝 쓰신다
그러면 그 사이에 끼인 나는 괜히 마음이 무거워져.
그냥 한 장만 쓰고 봉해서 보낼려고 했는데 뭔 심사로 말이 길어졌다
오이밭에 오이는 길죽한 오이..이리 보고 저리봐도
날씬한데 둥글둥글 호박이 놀러 왔다가 아잉아잉 뚱뚱해서 엉엉엉.
요건 오이밭에 일할 때 부르는 주제가여^^
아이고..네장째여
그만 쓰지요
2004년 7월 11일
덧; 문수전 오를 때 내가 풍경 사진을 몇장 찍었는데 나중에 필름 헐어 인화하면 사진 보내 줄게요. 문수전 바람에, 그 푸른 산빛에, 흰 새....생각나지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