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횃대 2006. 10. 10. 22:45

어제 아침먹고 청소하고 실실 앞논에 나가봤다

생수병 빈 통 하나 들고는 살곰살곰 논둑길을 걸어가니 제철 메뚜기가 이리뛰고 저리뛰고 난리다

눈먼 메뚜기 잡아서 생수통에 집어넣고 벼들을 살펴보는데 어쩌다 메뚜기를 잡기는 했어도 이렇게 식용으로 쓸라고 메뚜기 잡아 보기는 첨이라, 가마히 나를 쳐다보는 메뚜기에게 손을 오그리고 잡으러 갈라믄 은근히 겁이나고 초조하고 긴장이 된다. 재수 좋으면 두 마리 붙어 있는 메뚜기를 잡기도 하는데 집에 와서 두 마리 붙어 있는 것도 잡았다하니 고스방 왈,

"쪼뱅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거 하고 있는 메뚜기를 잡으면 갸들이 기분이 좋겠냐"

 

어찌나 메뚜기들이 기척에 일찍 반응을 하는지 논둑 하나 가로질러 가도 몇 마리를 못 잡았다. 누가 그러던데 밤에는 메뚜기가 불빛에 가만히 있는다네 옳커니, 그럼 밤에 잡으로 와야지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이부자리 봐 놓고는 렌턴을 들고는 모자까지 눌러쓰고 메뚜기를 많이 잡을랑가..싶어서 이번에는 큰 생수통을 들고 간다. 추석 지난 지 며칠 되었다고 달은 한쪽 귀퉁이가 현저히 까부러졌다. 내 시집 왔을 때는 앞 논 앞에 느릅나무가 우람했었는데 몇 년전부터 가지가 썩어서 꺾이더니 이젠 아주 사위었다. 몇 백년 됨직한 세월에 목질이 바스라졌다. 내년에 새 잎을 피워낼까, 아니면 올 겨울이 오래된 저 느릅나무의 무덤이 되는 계절이 될까.

 

신혼 초, 고스방이 논둑을 깎다가 내가 새참을 내어가면 그 느릅나무 아래서 새참을 먹었다. 참외를 깎아 먹고 수박을 갉아 먹고, 땀을 많이 흘린 때는 집간장 탄 물을 저 느릅나무 아래서 마셨다. 고스방은 말했다.

옛날 어릴 때는 여기에다 그네를 매고 뛰었지. 술래잡기를 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매미를 잡았더랬지.

개미처럼 나무를 오르내리던 까까머리 사내아이들은 이제 고향을 찾아도 느릅나무 아래에 모이지 않았고 소쿠리에 아비의 점심을 이고 오던 동강치마 계집아이들도 어쩌다 찾은 친정, 앞들논의 느릅나무를 기억하지 않았다.

 

렌턴 불빛을 아무리 벼잎사구에 비추어도 낮에 뛰놀던 메뚜기들은 다 어데로 갔는가. 해 넘어가면 그네들도 어디로 모여 밤잠을 자는가.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메뚜기를 찾아도 없다. 가끔, 아주 가끔 눈먼 메뚜기들이 벼잎에 붙어서 어설픈 내 손길을 피하지 못하고 생수통 속으로 잡혀들어갔다.

히뿌연히 밤안개가 내리고 있다. 사그라진 느릅나무도 깊은 안개 속에 윤곽처럼 보인다.

깜깜한 밤, 안개는 어깨 위에 세우처럼 나린다. 목덜미가 눅눅해지고 바짓가랭이가 볏잎에 스치어 젖어간다. 메뚜기는 없고 나는 논 가운데로 들어가 불빛을 비춰댄다. 생각나지 그 해 여름..

 

지금처럼 벼가 누릇누릇 할 때가 아니고 여름방학 때였다.

도라지꽃이 아침이면 팡팡 피어나던 고모집에 갔을 때, 동갑나기 고종사촌 호정이가 산에서 옻이 올랐다. 사타구니에 피가 맺히도록 긁어대는 아들에게 고모는 새벽이슬 나린 논으로 아들을 걷게했다.

아랫도리를 홀딱 벗고 이슬 머금은 벼 사이를 걷게하면 볏잎은 칼처럼 날이 섰다. 지금이사 병원에 가면 수이 나앗을 그 일을 그 당시 시골에는 병원 한 번가기가 그리 벅찬 일이였다. 나는 메뚜기가 잠 자러간 밤 논 가운데를 걸어가면서 호정이를 생각한다. 시집 오면 멀어지는 친정 친척들....절시를 한 벼이삭이 발 목에 휘감긴다. 엎어질까바 얼른 생각에서 깨어난다.

 

안개는 더욱 땅으로 가라 앉는다.

멀리 고속도로의 네온등이 둥그런 테두리속에 들어 앉은 것처럼 보인다.

안개 속을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는 급커브 노선을 돌아가는 불빛으로 감지가 된다.

댓마리의 메뚜기가 들고 뛰며 난리다.

이걸 먹어보겠다고 답답한 통속에 잡아 넣는 나도 참 모질다.

 

상민이는 이틀째 시험을 보았다.

내일 하루만 더 보면 시험을 끝이다

어제는 시험을 잘 못쳤는가 얼굴에 아주 실망이 역력하더니, 오늘은 조금 밝다

딸년이 도서관에 가고 난 뒤 고스방이 내게 조용히 묻는다

"오늘은 상민이 얼굴이 조금 밝은 것 같지? 그지?"

시험 때마다 저렇게 걱정에 스트레스를 받으니 이를 어쩔꼬.

 

지난 일학기 말 시험을 정신없이 치고 난 뒤 성적표가 왔을때, 고스방은 그걸 얼른 감추라고 했다

지금 성적은 봐도 뭔 말인지 해석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점수는 어띤가 안다. 점수를 훑어본 고스방이 그 자리에서 아이 성적표를 감추라했으니 딸년이 정신 한 번 놓은 것에 에비는 혼비백산이다.

 

하루하루 논들은 비어져 갈 것이다.

월류봉 봉우리에 저녁놀이 곱게 걸리면 걸릴수록 땅의 기운은 쇠하여 제가 가진 것들을 내 놓을 것이다.

내일은 기필코 사진기 들고 나가 미묘한 황금빛의 차이를 옮겨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