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횃대 2006. 10. 15. 05:38

아침 먹고 누가 시키기 전에 서둘러 나락을 펴 말리려고 회관 배꾸마당으로 나갔다.

다섯 번을 봉고트럭에 그냥 싣고 와서 부라려놓은 나락더미는 보기에 산과 같다

검은 나락멍석을 회관 마당에 혼자 이리저리 날뛰며 깔아 놓고는 나락을 퍼 날라 고르게 펴 놓고 나니

등때기 식은 땀이 난다. 딸아이에게 드링크 하나 가지고 오라해서 먹고도 혀 끝이 달라 붙는 듯한 갈증은 가져지질 않는다. 나락 골 지우는 가래를 세우고 그 작대기에 나를 의지한 채 너른 나락멍석을 바라보노라니

스무살 그 즈음 받늠 편지가 생각 난다.

 

편지래야 긴 내용이 아니고 기껏 제가 다니는 대학의 학보지를 보내며 그 띠지 위에다 간단하게 한 문장 써 보내는 것이 고작이였었지만 나는 그것이 고맙고 귀해서 그 한 줄의 내용을 오래오래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갈증나는 문장의 아쉬움을 나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는 그 때부터 편지를 쓰며 주끼던 일이 이젠 습관이 되었다.

 

낮에 대구에 있는 동창친구들이 모임을 한다고 황간으로 왔다. 이십오년이 넘는 시간을 그녀들과 같이 모임을 했으니 육개월에 한 번을 만나든 일 년에 한 번을 만나던 이물없는 대화들은 바로 어제 헤어진 듯 반갑고 정겹다. 백화산 초입 식당 뒷마루에서 아랫배가 두둑하도록 점심을 먹고 포도주 한 잔씩 하고는 평상에서 다리 뻗고 앉아 이야기를 한다. 사십대 중반 아지매들의 이야기로 맹 그런 이야기. 자식. 시댁, 이웃집이야기, 살....아직은 남편 사랑에 의심을 하는 이가 없으니 그것 만은 굳건한가 보다. 다행이다.

 

점심 먹고 앉아 이야기하는데 영 몸이 좋덜 않다

으슬으슬 춥기도 할라하고 정강뼈 아래가 왁신왁신 쑤실 징조를 보일라구도 하고. 하여간 말로 표현 못하는 아픔이 스믈스믈 내 몸을 점령한다.

집에 와서 대번에 끙끙대며 고스방 앞의 긴 의자에 누웠더니 몸살약이며 쌍화탕 찾아서 코앞에 들이민다

그걸 먹고도 아이구구구..비둘기 소릴 내며 앓고 있으니 절뚝거리는 다리로 방에 가서 찜질팩을 가져다 온도를 올려 배 위에 덮어준다.

 

"상머슴 빙나면 일 할 사람 없어 걱정이재요?"하고 물으니

"그걸 멀라꼬 말로 물어 싸아 여편네야"

몽고주름에 웃음을 조롱조롱 매달에 무릎담요까지 다독거리며 덮어준다

마누래 병나면 큰일이재. 해거름녘에는 이슬 내리기 전에 나락 채뜨려 덮어야 하는데 저는 다리가 아파서 저러구 있지 어머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지, 아들놈은 시험이라고 공부하러 가고 없지 딸년은 일 시키면 하는게 시원찮지 그렇다고 고함을 지를 형편도 안 돼지. 마누래 아프면 여간 일이 번잡시러운게 아녀. 어쨋던 상머슴 아픈건 막아야해...흐흐흐 이런 심사였을거다

 

약 먹고 저녁 내도록 약기운에 헤매다가 눈 뜨니 새벽 네시 반이다.

열어 놓은 부엌 뒷문으로 밤새도록 쌀랑한 기운이 마루까지 침투했다

나가는 뒤통수에다 고스방의 잠결 목소리로 보일러를 좀 켜라고 얘기한다

너무 오래 켜 두면 방이 뜨거우니 한 참 뒤에 끄고 잔다는게 정신이 말짱하게 깨였다

창 밖은 아직 어두운데 그 어둠 사이로  밤하늘에 흰 연기 한 자락 올라간다. 아마 화목보일러를 사용하는 집일 것이다.

 

아이들 방으로 들어와 문종우 잘라 놓은 것에 줄을 긋고 편지 몇 줄 쓰다가 책을 든다

토지 16권 완결편을 이제 중반부쯤 읽었으니 오늘 날 새면 종일 나락 멍석 뒤집어 주며 나머지 읽으면 다 읽을 것 같다.

양철 지붕 위에 무서리가 저리 축축하게 내린걸로 보아 오늘도 날은 따뜻하고 볕은 값없이 푸지겠다.

더불어 나락도 제 몸을 딱, 딱 소리 나게 말려갈 것이며.

 

 

 

 

 

 

 

 

감나무에 매달린 감도, 나락 멍석 위에 상순이도

종일 볕과 같이 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