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나흘이나 걸려 배추밭에 배추를 다 묶었다.
처음 갔을 때는 짚을 몇 가닥 추려서 이음매를 만들어 이슬이 덜 마른 아침에 그걸 묶고 있을래니 소매가 더 젖어서 올라오고 날이 차서 이빨이 딱딱 마주쳤다. 이슬이 생각보다 차다. 참이슬은 속에 털어 부어도 열이 확확 나더만 하늘에서 나린 이슬은 그렇들 않다.
한 골을 겨우 묶어 나가는데 도저 추워서 안 되겠다. 구름 사이로 햇님이 숨어 버리면 세상의 볕은 일시에 종적을 감추고 산 속에 웅크리고 있던 바람이 골안으로 불어제꼈다. 그럼 오줌 누고 난 뒤 진저리를 치는 것처럼 등골에 추위가 짜르르 흘렀다.
점심 준비할 시간도 되었고 해서 한 골도 다 짜매지 못하고 댓 포기 남겨두고 거름티미에 늦호박 달렸는 것만 두어 개 따서 집으로 왔다.
어머님은 여전히 시베리아 한랭전선이시고 나는 나대로 <여태 마이 굽어 들었는데 이번 만큼은 절대 그럴 수 없어!>하는 심정으로 입에다 쟈크를 채웠다. 이태껏 사이좋은 고부관계는 한 순간에 칼로 도려지듯 나둥그라져서 개바닥에 뒹굴고 서로가 서로의 움직임을 소리를 죽이고 느낀다. 머리가 아프다.
그러니 아침 설거지며 청소기 위잉 돌리자마자 빨래를 널고는 밭으로 간다. 볕이 따수운 아침도 있고 그렇지 않는 날도 있다. 밭으로 갈 때마다 저녁에는 월류봉 노을을 봐야지 다짐을 하지만 집으로 스며들면 이도저도 생각이 나지 않아 노을은 매번 놓친다.
둘째 날 배추밭에 갔을 때는 바람이 설렁 불어 볕이 좋아서 입고간 짚엎을 자두나무에 벗어서 걸어 놓고 배추를 짜맨다.이슬은 배추잎의 여린 잎맥에 아직도 머물러 몇 포기 안 짜맸는데도 면장갑은 축축하니 물이 흐른다. 외려 장갑이 젖으니 짚을 이어 묶는 일은 수월하다. 고추비닐끈으로 잘라서 하면 좋은데 그것도 나중에 배추 뽑아서 따로 골라 낼라면 일이다. 그래서 짚으로 한다. 짚은 나중에 배추 뽑아와 다듬을 때 배추 겉잎사구랑 같이 뒤섞여도 소가 먹는거라 상관이 없다. 열댓 포기나 묶었나? 고스방이 띨랠래래래래 전화가 왔다. 어머님과 고스방도 서로가 언성을 높였던 관계로 고스방도 어머님하고는 소원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꼭 밤에 방바닥이 차지 않았냐고 어머님께 여쭤보더니 그것도 고만 쑥 들어갔다. 효자효자 했더니만 알고보니 그것도 아닌게비다. 사람이란 이렇다. 엄마랑 소원해진 고스방이 눈에 뜨게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또 살갑게 한다.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냐 하겠지만 사람의 관계란 그렇다.
"외국인 손님을 태우고 의정부까지 가야하는데 같이 갈래?"하고 묻는다
어떡하던지 집구석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는 길도 안내할 겸 같이 가지요 하고 대답한다.
이음매까지 맹근 짚끈을 내팽개치고 고서방을 따라 의정부로 향한다. 세상에 숨통이 트여 살 것 같다.
뒤에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나이 수긋한 남자가 타고 있다. 순박해 보이는 눈동자다. 언제 한국에 왔냐고 물으니까 말을 못 알아 듣겠단다. 몇 번 손짓 섞은 대화를 시도하다가 말았다. 나는 영어가 안 되니까.
고서방의 걱정과는 달리 길은 시원하게 의정부까지 뚫렸다.
덕정리 전철역을 찾아가야 하는데 역이 동두천 가까이 있다. 서울 사는 사람에게 전화로 물어 본다.
어딜가도 산재해 있는 <아는 사람>들이 고서방에게는 신기하기도 하고 못 마땅 한 일이기도 하다
방글라데시 노동자를 그 쪽 선이 닿는 사람들에게 인계하고는 황간에서 차를 부른 사람이 부탁한 심부름도 해결을 하는데 두어시간 지체 되었다. 고스방은 조바심이 난다.
가을 비가 내린다.
종일 추적추적 비가 내려 고스방 말로는 이렇게 나선김에 여편네 옆자리에 태우고 강원도로 한 바퀴 돌까 생각했더만 비가 와서 안 되겠단다. 안 될 이유는 만들면 얼마든지 생기지.
그래도 좋다. 옛날 친정 동생 면회를 갈려면 의정부를 거쳐 갔다. 파주 적성.
연천 가기전에 파주 쪽으로 꺾어 갔으니까.
길은 그 때의 모습을 간직하지 않았지만 방향은 간직하고 있다.
가면서 여기쯤 삼양라면 공장이 있었는데....여기는 또 무엇이 있었는데...하니 고스방이
대구 촌놈이 엥간히도 돌아댕겼나보다 한다. 말씀이시라고요..
지금이사 옴쭉달싹도 못하고 매인 몸이지만 츠자적에는 환상이였지요
저어기 임진각에서 나주 해남까지... 쉬는 날 마다 열심히 돌아댕겼더랬지요. 서울만해도 얼마나 자주 왔는지 서울 변두리 양반보다는 내가 더 지리가 환했당께요..속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걸 간신히 참는다. 말해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다.
점심을 먹고 집에 오니 여덟시가 다 되어간다.
세번째, 배추밭에 가다.
여전히 이슬이 내렸고 장갑 낀 손은 흥건히 젖었다.
하다가 짚이 없어서 집으로 오다.
집에 오니 어머님이 부엌에서 반찬을 만드시는가 왔다갔다 하신다.
밥을 앉히고 나도 몇 가지의 반찬을 만든다.
표고버섯을 볶고, 호박나물을 볶고, 제사에 쓴 가오리와 대구포 불린 것을 양념해서 조리고...
어머님과 나는 마치 반찬 경쟁을 하는 사람처럼 이것 저것을 만든다.
서로가 만든 것을 식탁 위에 얹어 놓고 어머님은 아버님을 기다리시고, 나는 고스방을 기다린다.
아버님이 먼저 들어 오셨고 어머님은 어머님이 만드신 반찬을 아버님 밥 그릇 앞에 나란히 진열한다. 이것은 뭐로 만들었고, 이것도 먹어봐요. 나는 같이 밥상에 앉지 않았다.
저녁이 오고 나는 그 날도 노을을 보지 못했다.
노을을 쳐다보면 내 속마음 응어리가 풀어질래나
아니아니아니아니 이렇게 제멋대로 뻣대는 마음이 조금 수그라들라나
술 독에서 뭉글뭉글 괴 나오는 술거품처럼 나으 독한 기운이 조금 가라 앉을래나.
나흘째, 배추밭에 가다.
논에 가서 짚을 한 다발 다시 가지고 와서 배추를 묶었다.
분도고모부와 큰아바이가 포도밭에 거름을 내나보다
경운기가 탈탈 우리 밭쪽으로 사라지는 소리가 나고 분도큰아바이는 거름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장가도 못가고 사람이 좀 모질라서 동생 집에서 일만 하며 평생을 보낸다.
교통사고 나기 전까지는 우리집에도 곧잘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밑도끝도 없이 했었는데 그나마도 이젠 시들한가 보다. 뒷뜸 대밭에서 대나무를 쳐와 가끔 우리집에 대비도 한 번씩 매어왔다. 그럼 나는 그게 고마와 담배 한 갑을 사다가 낡은 윗저고리에 꽂아 주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
이슬은 여전하고 물에 젖은 장갑끝이 짚 이음매에 자주 물렸다.
거름을 새로 실으려고 분도고모부가 경운기를 끌고 오다가 나를 보고는 한 마디 한다
"너무 꽉 짬매면 안되여. 아직도 속이 찰라믄 시간이 좀 더 걸링께"
나는 배추 묶은 짚끈을 이리저리 흔들면 너무 꽉 짜매지 않았다는걸 보여준다
"고 정도로 하면 되긋구만..."
드디어 배추 묶는 걸 다 하고 밭둑가에서 사과 한 알 깨물아 먹는다
달콤한 과육이 입안에 가득하다. 사는 일이 늘상 이 사과 향기처럼 달콤하고 맛있으면 좋으련만
생은 그렇지 않다. 신나물보다 더 쓸 때가 더러 있다.
어제 밤에 만든 달력과 미국으로 보낼 책을 가지고 우체국으로 갔다.
우표를 사서 침을 발라 봉투 여불때기 윗부분에 탁, 소리나게 붙인다.
'나 대신에 니들이라도 어디로든 훨훨 가그라..'
나는 속으로 이렇게 한 마디 주끼고 직원에게 편지를 건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