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늘어진다니까..
지난 토요일,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그 날 해거름녁에
고스방과 나는 친구 내외와 직행버스를 잡아탔다.
동네 어릴 때 같이 크던 소위 부랄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어
일년에 한 번은 여편네와 동부인해서 만나는 모양이다.
나도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그날이라 결국 모임이 겹쳐지고
말았는데 대구로 튈려고 용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이건 뭐 내 약속이야 상관없고 자기 모임에 무조건
가야한다고 막무가내이다.
다른 친구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같이 온 사람도 있고
마누라를 델고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모범운전기사 고스방은
운전기사만 모범을 하면 될걸 동창모임 출석에도 요만큼의
안모범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내 모임을 포기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직행버스에 올랐다
대전 탄방동에 내리니 거기도 마찬가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거리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탄방동은 예전의 모습은 눙깔 씻고 봐도
없고 어데 서울 번화가를 한 삽 퍼다놓은 듯 반듯반듯한 길에
먹자, 입자, 즐기자, 때빼자, 광내자..뭐 이런 도시형태가 형성되어
우리가 예약하고 들어간 횟집은 내 머리 속의 횟집 식당의 개념이 아니고
회집주식회사였다.
세상에 멀건 유리창 밖에서 그 건물을 치어다보니 층층이 사람들이 바글바글
개미굴의 단면을 잘라 놓은 듯 많은 사람들이 꼼지락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들어가니 돛대기 시장이 따로없다 종업원과 기다리는 사람, 먹고 나오는 사람
먹는 사람들이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매달려-회 먹는 일- 정신이 없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술잔이 오가는데
고스방은 내 시집 오고 첨으로 소주를 석 잔 한 자리에서 마셨다.
붉은 피톨이 고스방의 얼굴로 일제히 몰려들고, 고스방은 단풍고스방이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밥만 먹고 대구 동창모임으로 튈려고 가볍게 워밍업을 하던 내게
동창놈들의 전화는 연신 울려대고, 전화를 받으로 밖으로 나가면 고스방의 취기 띈
눙깔이 나를 꼬라보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는 노래방으로 간다.
널찍한 방에서 청주 모 동네의 동장으로 있는 철석씨가 가볍게 춤을 추자
좌중은 후라이판에 콩기름을 쫘악 두른 듯 화기애애한 윤기가 번지기 시작한다.
신이난 우리의 동장님, 허리끈을 풀르드니 바클 부분을 입에 물고 허리끈을
꼬부랑하게 만들어 색스폰 부는 흉내를 내는데 모두 뒤집어졌다.
고스방은 노래방에서도 절대 모범..운운의 완장을 벗어 놓지 않는다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면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올라 가 있는 듯 잔뜩 긴장을 해서
듣는 내 손아귀에 땀이 고이게 만든다.
한시간, 아니 서비스 반시간까지 한 시간을 들고 뛰었으면 오십이 내일인 아자씨들이
기운빠질 만도 한데 내친 김에 돌리고돌리고 하더니 한 시간을 더 넣고 온다.
참 노래들도 잘 부른다.
나는 음주는 좀 되는데 가무가 통 안되는 관계로 꿔다놓은 보릿자루다.
그게 안되보였던지 고스방이 노래책을 던져주며 한 곡 불러보라한다.
집에서는 혹간 내가 티비의 노래를 따라하면
"대장간에서 칼 들고 온데이..."하며 고만하라고 티박을 주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신나게 노는데 구석자리에 처박혀 있으니 좀 불쌍해보였나보다
"노래도 못하는데 뭘 해요..."하고 책을 밀쳐놓으니
"자꾸 해야 감각도 살아나고 잘 하는거야 함 해봐.."하고 은근히 권한다.
신청곡 <밤이 깊었네>
그걸 꽥꽥 부르니 오십을 목전에 둔 아자씨들이 눈이 우왕좌왕 하더니..이 무슨 노래고
생진 첨 들어보는 노래네..한다. ㅋㅋㅋ
노래방을 나와 여관에 들라하니 큰 방이 없단다. 찜질방으로 초등학생 수학여행 행렬로 걸어간다
여전히 거리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찬 탄방동거리이다.
이렇게 눈발도 휘날리는데 어데 좀 쏘대다 드가야지 그냥 가면 서운하지 않겠어요?
둘둘 말아 가져간 숄을 어깨에 휘감아 돌리면서 내가 한 마디하니까
모두 나이 사십을 퍼내삐리고 십대로 돌아간다.
그라자..쪼매 더 걷다가 가자. 아이다 한 잔 더 하고 들어가자.
찜질방에 여자들이 먼저 들어가고, 남자들은 다시 나가더니 들어 온 시간은 모른다. 다만 아침에 만나서
제 가방을 들고 현관에서 만났다는 것.
해장국 한 사발 하러 가는데 몹시 춥다.
눈보라가 그친 아침은 쨍하니 맑고 시리다
손이 시려워 서방 잠바에 손을 넣으니
"여편네야 잠바 주무이 늘어져.."하며 손을 기어이 빼낸다
속으로
"지기럴.. 그 주무이 늘어질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살았으면 ..."
길에서 내외가 나란히 걷는 것도 민망한 고스방.
친구들이랑 같이 걸어가는데 제 주머니에 손 넣는 마누라의 유난이 쑥쓰러운게다
그는 모범운전자다 ㅎㅎㅎ
초딩모임에는 못 갔지만, 그럭저럭 망년회 한 껀 떼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