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과 화엄
쇼핑 카트를 밀며 간다
이제 막 구워낸 향긋한 빵 냄새,
종가집 김치의 풍성한 맛이며
맛있게 구워진 은행 알 노릇한 빛깔처럼
생활이 충만한 미로 속을 간다
카트 위에 어린 딸을 앉히고
화엄의 미로 속을 간다
자본이 미만해 있는 통로들엔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상품들이 손짓한다
두둑한 지갑만 있다면야
무슨 불행이 있으랴마는
밖으로 소비를 부추기는 미녀들과
안으로 번쩍이는 골드 카드의 유혹,
자본화엄이 아니라 화염이다
언제나 모자라는 현금의 고통이여
리비도는 폭발하여 열반하려 한다
경계를 부수고 환상적 소비를 해 볼까?
전자상가에 번쩍이는
현란한 디지털 화엄의 번뇌여!
오늘도 숨을 몰아쉬며 허덕이며
고달픈 자본의 언덕을 기어오른다
금강의 바위를 지나
반야의 언덕을 지나니 거기
열반화엄의 파노라마가가 펼쳐진다
번뇌가 곧 열반이리라
극빈의 화엄풍요, 환상의 화엄극빈
조금 무거워진 쇼핑 카트를 밀며 황홀한 통로를 나온다
어린 딸과 함께 자본화엄 미로 속을 빠져나온다
언제나 내 번뇌의 뿌리인 자본의 궁핍
언젠가 내 기쁨의 화엄인 어린 딸아이가
거실에서 손바닥만한 화엄경을 가지고 놀았었지
선재동자인 양 착각했었지
화엄경은 내 어린 딸의 장난감이었지
화엄은 내 기쁨의 뿌리요,
자본은 내 번뇌의 뿌리요,
열반의 근거이다
고명수시인-'자본과 화엄' 전문-
딸아이가 이제 고삼 올라간다고
전자사전을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곧
사달라는 이야기와 통한다.
덩달아 고일이 되는 아들놈도
공부를 열심히 할려면 그런게 있어야한다며
연일 둘이서 머리를 맞붙이고
전자사전 서핑에 나섰다.
이것은 사양이 어떻고
저것은 무슨 기능이 있고
요건 모양이 조금 후지고
저건 색깔이 좀 거시기하단다.그러면서 고르고 골라
드디어 마음에 들었다며 장바구니에 담아 놓는다
얄팍한 책 한권만한데 돈은
옛날 문학전집 한 질 값이다.
허기사 작은 것 안에 들어앉은 용량은
문학전집 한 질에 버금가는 양이겠으나
반찬조차 질보다는 양으로 따지는 내게
아무리 들여다보아야 그깟껏 몇 푼들어간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앞선다.
둘이서 서로 이것이 좋네 저것이 좋네 하다가
딴에는 에미 주머니 사정 고려해서
한 놈은 좀 가격이 낮은 걸로하고
또 한 놈은 고급사양으로 해서
서로 번갈아 가면서 쓰자고 애길한다.
그러나 서로가 낮은 가격의 전자사전 쓰는 것을
양보한다. 이걸 양보라해야하나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리고는 단어 선택이 어째 잘못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제 에미의 지갑 속은
이미 번뇌를 넘어 열반의 경지에 올랐는데
텅, 텅, 텅,
無의 경지에 올랐는데.
영어사전 뜯어 먹어가며 공부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그야말로 전설이다
책 한 권만한 기계 속에는
수십곡의 노래도 들어 있고
사전 여섯권 분량의 지식이 들어 있고
수시로 손가락으로 하는 게임이 들어 있어
분명 <어마어마>한 물건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어쩐지 육화 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
이것도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인가.
나는 자꾸 낡아가는 외투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