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동맹 상순이

Sr.Mari Rufina

황금횃대 2007. 4. 9. 13:26

 

내 쇠락해가는 살림살이의 현주소를 색연필통이 잘 말해 주고 있다. 미세한 명도 차이까지 알뜰히 색색으로 모아 들이던 유난을 버렸다. 몽당 색연필을 모두 모아서 작은 종이 가방 속에 쓸어 넣고, 그래도 연필을 잡으면 손아귀 바깥으로 자루가 나가는 것만 통에다 다시 넣는다. 그러고보니 넓은 플라스틱통이 휑하니 썰렁하다. 그러나 아직 헐지 않는 색연필 통에는 쭉쭉빵빵 원형의 길이를 그대로 간직한게 몇 통 있지만, 그 자잘한 몽당 색연필이야말로 내 이십대와 삼십대의 시간, 그리고 사십대의 또 몇몇 시절들을 닳도록 같이 한 것이라 낡아도 편한 옷처럼 쉬이 버리지 못한다.

 

손으로 만든 가방을 받고는 얼마나 기쁘고 좋던지 1학년 새로 들어갈 때의 아이처럼 나는 책을 챙겨 넣고 상민이 생일 선물로 받은 필통을 쌔벼서 내 볼펜과 연필을 빵빵하도록 챙겨서 또 그 가방에 넣어 보는 것이다. 길다란 메모지,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힌 오래된 나의 노트. 손수건도 새로 다려서 넣어 본다.

 

이제,

어느 뜬금없는 날을 잡아 어데로 떠나기만 하면 내 출렁이는 발걸음만큼 가방 속에서 뛰어줄 그것들이 있어 나는 낯선 곳에서도 심심하지 않을터.

 

이즈음 몸이 약해졌다는 구실을 내세워 나는 살금살금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무턱대고 덤비면 안될끼 어딧노, 사람이 해서 못할 일이 또 어딧냐며 나는 너무 날뛰었다 그동안.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심지어 감정까지도 조용조용 움직여야지하고 다짐을 해보는 것이다. 내가 약해졌음을 인정하지 않아서 무리수를 뒀으니, 이제라도 그렇게 안 하는 훈련을 한다. 조금씩 나아지겠지.

 

봄이라 들판에 올라오는 풀들은 그지없이 앳되고 이쁜데 나는 자꾸 춥다.쑥 뜯어다 쑥떡 한번 해먹어야지 하는 것도 자꾸 뒤로 미루진다. 건강하고 잘 지내. 가방은 너무 고맙다.

 

                                                                                                              

2007년 4월 9일 상순